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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도 괜찮아, 온천이 있으니까

어머님과 함께하는 여행의 충분조건

by 바다기린


대전 곳곳에서 만난 봄


어머님과 여행을 갈 때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회’와 ‘온천’이다.

회가 없으면 초밥이라도 있어야 했고 온천이 없으면 숙소에 욕조라도 있어야 했다.


몇 해 전, 남편과 아주버님 그리고 어머님 셋이서 경주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저녁은 회를 먹고 싶다는 어머님 때문에 포항까지 다녀오느라 정작 경주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두 아들은 어머님이 하고 싶은 것이라면 합리성이나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 그럴 거면 포항에서도 1박을 하든가

- 어머님께서 드실만한 다른 메뉴를 경주에서 찾아보든가

- 애초에 여행지를 경주로 하지 말든가


나로서는 물음표만 남는 일이었다.

사실 어머님께서 왜 여행을 좋아하시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발목 연골이 거의 닳아 많이 걷기 힘드신 어머님은 가까운 거리도 웬만하면 차량으로 이동하시려고 한다. 음식도 가리시는 게 많고 새로운 볼거리나 체험에도 별로 흥미가 없으시다. 그래서 그곳이 어디든 늘 비슷한 패턴이다. 드라이브하고, 쇼핑하고, 회와 맥주를 마시면서 옛날이야기를 하시고, 목욕하시고. 이 모든 게 가능한 부산은 가장 자주 소환되는 여행지이다. 일단 시댁 식구들의 오랜 터전이기도 했고. 나도 어머님과 부산을 서너 번 정도 갔다.


어머님의, 어머님에 의한, 어머님을 위한 여행

어머님의 뒷모습을 담아보다


올해 4월에도 어머님께서 갑자기 어디든 가고 싶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산을 피하고 싶었다. 이미 3월에 한국을 찾은 동생네 부부와 부산-경주 여행을 다녀왔고 남편도 길어야 3일 정도만 시간을 낼 수 있는 상황이라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를 써야 하는 장거리 이동은 부담이었다. 그래서 내가 떠올린 곳이 대전이었다. 대전에는 회는 없지만 유성온천이 있다. 어머님 댁인 안성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이니 1박 2일 일정으로 잡고 올라오는 날 어머님께서 좋아하시는 삽교호 회센터에 가서 회를 사다가 어머님 댁에서 먹고 이튿날 올라오면 3일을 아쉬움 없이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님께서 집을 떠나고 싶어 하시는 주기는 생각보다 잦다. 그 주기가 두 번쯤 돌아오면 그중 한 번을 우리가 함께하게 되는데 대략 석 달 텀인 것 같다. 부산은 그리 멀지 않을 다음 텀에 가면 될 테지. 이번에는 어머님께도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었다.


우리는 결혼하고 나서도 한참을 차 없이 지냈고 그때는 어머님께서도 사업으로 바쁘셨던 시기여서 본격적으로 어머님을 모시고 다닌 지는 4년 남짓 되었으나 1년에 국내 해외 합쳐 서너 번은 함께 했으니 노하우가 쌓이기엔 충분한 횟수였다. 문제는 이 노하우를 나만 축적한 것 같다는 데 있다. 게다가 여행에서 철저히 J형 인간인 내가 노하우까지 장착하자 남편도 어머님과의 여행에 내가 동참하는 것을 선호했다. 나는 늘 최적의 동선에서 최선의 선택을 제안하고 필요에 따라 (아들들과는 달리) 어머님께 휘둘리지 않고 설득까지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파티원이니까. 그렇다. 나는 본인의 필요와는 관계없이 경험치에 비례하게 진화해 버렸다.


넉살 좋은 나와 다르게 남편은 처가 식구들과 여행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지라 나에게도 대놓고 같이 가자고 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웬만하면 함께 가려고 하는 이유는 다 내 성격 탓이다. 기왕 시간과 비용을 들여 놀러 가서는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가는 게 더 재밌다고 해주시니 어깨 으쓱한 기분을 즐기는 인정욕구 강한 며느리는 그냥 꽹과리만 쨍-하고 한 번 울려줘도 혼자서 탈춤을 추는 것이다.


집에서 출발해 안성 어머님 댁에 가서 어머님을 태우고 대전으로 향했다. 호텔에 체크인하기 전에 대청호를 산책하고 점심을 먹고 카페를 들르는 계획이었다. 그 무렵 대전은 벚꽃이 아주 예쁘게 한창때였다. 이번 봄은 유독 춥고 흐린 날이 많기도 했고 시기도 아직이라 서울에서는 벚꽃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대청호에 가는 길부터 드라이브 코스가 아주 멋졌다. 대청호를 빙 둘러 데크길로 산책로가 잘 되어 있어 끝까지 걷고 싶었지만 오래 걷기 어려운 어머님을 배려해 중간쯤 벤치에 앉아서 시야에 닿는 범위 내에서 풍경을 감상했다. 어머님은 벚꽃보다 애먼 민들레나 들풀에 더 관심을 보이시긴 했지만 어쨌든 이 장소를 즐기고 계신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밀가루의 고장이라는 대전에서 칼국수가 특히 유명하다길래 수타로 면을 만드는 칼국수집에 찾아갔다. 파전도 함께 시켰는데 어머님은 파가 별로 안 들었다며 부산의 동래파전 이야기를 한참 하셨다. 어이쿠, 부산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지. 결국 좋아하시는 맥주 한 병으로 입맛을 돋워 드려야 했다.

체크인을 하고 온천을 하러 갔다. 나는 어머님과 맨몸을 터놓은 사이는 아니라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어머님께서 근처에 다른 온천이라도 꼭 다녀오라고 하셨다. 혼자서 목욕을 하면서 ‘엄마랑 왔으면 안 심심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어머님도 심심하시겠다 싶었다. 원래 탕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큰 재미인데.


딸이 없는 어머님한테 딸 노릇을 좀 해드리자고 다짐해도 이렇듯 한계는 늘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남편이 언젠가 돌이키며 좋은 기억으로 간직할 이 시간에 내가 함께 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혹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 남편이 ‘그때 우리 엄마가 온천하고 나서 대전도 참 괜찮은 곳이라고 그랬는데’ 하면 ‘맞아,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도 또 가고 싶다고 그러셨었잖아’ 하면서 그 현장, 그 시간, 그 감정을 똑같은 경도로 꾹 눌러 문질러줄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나 역시 남편에게 그런 부분을 바란다. 그래서 좀 더 자주 우리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나처럼 행동으로 쉽게 옮길 수 없다는 것도 남편과 살면서 배웠다. 지금은 서운하기보다 아쉬움인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내가 기꺼이 어머님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한 번씩은 남편도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본인 엄마에게 하는 것을 보며 느낄 테니까.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니까. 어쨌든 지금은 어머님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동기가 된다.


저녁 메뉴는 돼지갈비로 정해두었다. 남편이 ‘우리 엄마는 고기 안 먹어’라고 했지만 내가 살핀 어머님은 단순히 고기여서 안 드시는 게 아니라 육향을 싫어하시는 거였다. 역시나 달짝지근한 양념이 된 고기는 제법 잘 드셨다. 덕분에 회 없이도 하루 일정을 만족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음날 성심당에 갔다. 어머님은 빵을 냉동시켰다가 먹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고 하시면서 나를 따라 드시고 싶은 걸 양껏 트레이에 담으셨다. 그중 당장 먹을 빵을 추려 대전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당시 <반고흐> 전을 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인파가 두려워 가보지 못했던 전시라 반가운 마음에 들렀다. 어머님도 전시회를 보시는 걸 좋아하시는 편이라 관람은 만족스러웠다.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 앞 정원에서 가져온 빵과 커피를 먹었다. 살랑이는 봄바람 아래 여린 초록빛이 움튼 잔디밭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가볍게 때운 점심식사. 어머님은 이 시간을 참 좋아하셨다.


바로 옆이 한림수목원이라 어머님께 한 바퀴 돌고 가시자고 했는데 어머님께서는 걷기 싫다며 너희 둘이 다녀오라고 하셨다. 전시회까지 보고 나온 마당이니 더 이상 걷기가 싫으셨던 것일 수도, 어쩌면 아들 부부내외의 데이트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으셨던 것일 수도 있겠지. 어머님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우리까지 안 간다고 하면 마음 불편해하실까 싶어 얼른 돌아보고 오기로 했다. 어제의 대청호만큼이나 이곳도 봄 꽃들의 향연으로 아름다웠다. 벚꽃뿐 아니라 조팝꽃에 겹벚꽃, 수선화까지 잘 조성해 둔 꽃밭을 부지런히 눈에 담으며 이 시기에 대전에 온 것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어머님을 위해 온 여행이었는데 오히려 우리가 좋은 구경을 실컷 했다.


우리끼리 회 파티


돌아오는 길에 계획대로 삽교호에 들러 회를 샀다. 어머님댁에서 푸짐하게 펼쳐 놓고 매운탕까지 끓여 여행의 마무리를 즐겼다. 이로써 어머님께 여행에서 필수적인 ‘회’와 ’ 온천‘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시켜 드렸다. 뿌듯함이 커진 만큼 마음속에 생색도 커졌다. 우리가 매번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내어 함께 해드리는 걸 어머님께서도 고맙게 생각하시려나? 혹시 본인은 비용을 댔으니 응당하다고 생각하시려나?


우리 모두의 여행


이번 여행 전에도 여느 때처럼 어머님께서는 그랬다.

“경비는 내가 다 낼 테니 가자”


특히 본인 생각에도 너무 자주 어디 가자고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실 때 더 강조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라도 해야 우리가 따라나설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싶어 조금 짠하기도 하지만 어머님이 여행을 가자고 하실 때마다 예상치 못한 지출을 해야 한다면 그 또한 부담인 것은 맞다. 실제로 어머님께서 백 퍼센트 모든 비용을 내시는 건 불가능하다. 출발 전에 숙소도 미리 예약을 해두어야 하고 커피를 사는 등의 자잘한 비용까지 ‘어머님이 다 내신다고 했잖아요’라며 뒷짐 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여행 동안 어머님께서는 본인 카드를 우리에게 맡겨두신다. 그러면 우리가 결제할 때 당연히 그 카드를 쓴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하지만 어쩐지 염치가 없어 우리 카드를 쓸 때도 많다. 그렇게 한 번에 몇 십만 원씩 쌓이다 보면 우리는 정해놓은 생활비 외에 추가지출을 거의 매달 하는 셈이 된다.


나는 우리 부모님과 여행할 때 철저히 ‘n 분의 1’로 경비를 분담하고 왠지 두 분이 비싸다고 안 먹는다고 할 것 같은, 하지만 내가 꼭 맛 보여 주고 싶은 식사가 있다거나 모시고 가고 싶은 숙소가 있을 때만 그 부분의 비용을 전담한다. 그러면 여행비용을 정산할 때 엄마는 으레 내가 추가로 쓴 부분을 어림해 본인들 몫보다 웃돈을 얹어 나에게 보내주곤 한다. 우리 부모님은 매달 생활비를 정해놓고 그에 맞춰 생활하시기 때문에 함께 여행을 가려면 미리 합의하고 계획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횟수로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이다.

어머님과도 좀 더 흔쾌히 여행을 다니려면 어느 정도의 예측가능함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경비 리스트를 작성하고 어머님 출자 비용, 우리 출자 비용을 따로 정리해 공유드렸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 이렇게 매번 즉흥적으로 여행 가는 것은 어려워요. 저희도 생각보다 비용이 든다구요.‘ 였지만 실제로 덧붙인 메시지는 이러했다.


“ 이 비용을 온전히 저희 생활비에서 썼다면 부담이 많이 됐을 텐데 항상 어머님 덕분에 즐기는 것에 비해 비용을 적게 쓰는 것 같아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마음이에요.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어쨌든 어머님 돈이든 저희 돈이든 여행 가면 돈이다라는 것도 느끼네요. 어머님도 힘들게 버시는 돈인데 아낄 수 있는 건 아껴보자는 취지에서 이렇게 놀 때 비용이 어느 정도 나온다 라는 감은 챙기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정리해 봤습니다! “


구구절절 에둘러 투정하는 걸 알아채셨을까 싶어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초조했다.

하지만 이미 전송취소할 수 있는 시간도 지났거니와 마음에 찜찜함을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상 무를 수도 없는 말이었다.

딸만 둘인 우리 엄마와는 너무 다른 아들만 둘인 어머님이라, 그리고 무엇보다 내 엄마가 아니라 나는 어머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확인을 하고 싶어진다. 오해를 하고 싶지 않아서다. 충직한 아들을 믿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거침없이 요구하시는 건 아닌가. 아들이 힘들게 장거리를 운전하거나 며칠 시간을 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 건 아닌가. 놀기 좋아하는 며느리는 어디 가자고 하면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닌가. 우리 엄마였으면 대놓고 ‘엄만 왜 그래?’라고 물어보거나 ‘엄만 원래 그래’라고 포기할 것도 자꾸만 누울 자리를 비워 주시는 어머님 때문에 삐적삐적 마음의 소리를 펼쳐 놓게 된다.


“우와~~ 그래도 좋네. 봄이 맘에 가득해. 인생에서 추억을 기록한다는 게 얼마나 건강하게 만드는지~ 사랑해. “

“나도 정신 차려서 여행해야겠다고 기뻤어. 우리 기린이 최고~ ^^(하트).”


어머님의 답장을 받고 뭉클했다. 일단, 내 의도를 어머님께서 왜곡하시지 않고 잘 이해해 주신 것 같아 감사했다. 아마 어머님도 나를 봐 오신 세월 동안 알게 되셨을 거다. 내가 속에 없는 행동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 메시지가 어머님과 여행하는 것은 좋으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을 뿐이라는 뜻임을 알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어머님께 내가 생각했던 필요조건 외에 한 가지의 진실한 충분조건이 더 있었음을 깨달았다. ‘함께 하는 시간’을 ‘아직’ 누릴 수 있다는 기쁨. 어쩌면 나와 어머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여행에서 같은 조건을 요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머님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함께 해주길 요구했던 것이 아니고, 나는 어머님께서 하고 싶은 것을 함께 해드리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추억’이 되어주고 싶다는 그 자체로 충분한 동기 말이다.


우리의 대전 여행은 온천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가 있어서 괜찮았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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