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얼굴
4일 뒤,
나는 결국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했다.
내 발로 순순히 진찰실로 들어가 수술의사를 밝히고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마치 모든 걸 체념하고 신체 포기 각서를 쓰는 빚쟁이처럼.
'내 오른쪽 눈을 드릴 테니 제발 살려주세요. '
주치의 선생님은 여기저기 전화를 한 끝에, 수술을 가장 빠른 날짜로 잡는 데에 성공했다고 했다. 옆에 있던 간호사도 참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분위기에 화답하듯 애써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술까지 남은 시간은 3주.
큰 병원에서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환자에게 있어 무척 기쁜 일이다.
… 나에게는 지금의 얼굴로 살 수 있는 시간이 3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수술 일시:2025년 4월 8일 8:30
수술 내용:안와내용물제거술,
이하선과 임파선 제거, 수술부위 피부 이식
예상 소요 시간 : 약 10시간
입원 기간 : 약 2~3주 미정
회복기간 : 미정
수술이 확정되고 나서야, 내가 받을 수술의 이름이 '안와내용물제거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기괴한 이름이다. 눈구멍에 있는 내용물을 없애버린다니.
게다가 수술에 대한 정보는 왜 그리도 없는 건지. 정보의 바다라던 인터넷에서도 같은 수술을 받은 사례나 회복에 대한 언급조차 찾을 수가 없다.
수술만 결정되면 마음이 놓일 줄 알았는데, 수술에 대해 알면 알 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이 선택이 맞는 걸까?
사실은 하지 않아도 되는 수술을 받는 거 아닐까?
다 취소하고 방사선 치료부터 하자고 할까?
시간이 좀 걸려도 한국에서 검사부터 다시 받아볼까… '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한국에서 안과 종양 치료로 알려진 의학과 교수 두 명에게 메일을 보내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절실한 마음에 보냅니다. 메일만으로 정확한 진단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일반론이라도 괜찮습니다.
안와내용물제거술을 받게 된 저의 상태는...
진료 기록과 MRI, CT 영상을 첨부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동안 진찰실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기억을 모으고 모아서 설명하고, 암의 위치는 직접 그림을 그려서 덧붙였다.
시계라도 좀 보고 보내면 좋았을 걸. 정신없이 메일을 완성하고는 새벽 한 시에 송신 버튼을 눌러 버렸다.
메일을 보낸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점심시간,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안와내용물제거술을 권유받으셨다니, 막막한 심정이시겠습니다...
눈을 살리고 종양만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아닌 이상, 눈꺼풀, 안구 제거 수술이 최선의 치료로 생각됩니다 (수술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과거 저희 병원 한 환자는 결국 사망하셨습니다).
종양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방사선만 하는 경우는 추천되지 않습니다…
읽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혹시 답장이 없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걸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대형 병원의 교수님이 나의 절실함을 알고 근무시간까지 쪼개어 메일을 보내주었다 생각하니, 큰 선물을 받은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며칠 후 거짓말처럼, 또 한 명의 교수님에게서도 무척 자세하고 긴 답장이 왔다.
안와내용물제거술 후의 외형이나 삶에서도 많은 것이 바뀔 것이 자명하여 환자 입장에서 주저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눈꺼풀암은 보통 작아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MRI로 보일 정도로 큰 경우여서 일본 병원에서도 제거 수술을 권유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행이다. 두 교수님 모두 지금 다니는 병원과 같은 의견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이제는 이유 없이 눈 하나를 잃는 걸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 받아들이자 '
한쪽 눈을 잃기 전에 하고 싶은 것들—
두 눈으로 바다 보기, 영화 보기, 여행 가기...
는 무슨.
나는 회사원이다. 먼저 하던 일부터 정리해야 한다.
수술날짜가 정해진 다음날, 급히 회사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긴급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내가 하던 일 하나하나 매뉴얼을 만들어서 팀원들에게 설명하고, 거래처마다 연락해서 담당자가 바뀔 거라고 안내하고, 인사하고…
결국 수술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일은 일대로, 수술 전 검사로 틈틈이 병원에 다니느라, 내가 받을 수술에 대해 알아보느라—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더 바쁘고 분주하게 지내야 했다.
그리고 남은 건,
미루고 미루던 마지막 숙제.
"엄마가 눈 수술 때문에 한동안 집에 없을 거야.
이제 2학년 언니니까, 아빠랑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고, 잘할 수 있지? "
"응! 잘할 수 있어! 근데 엄마 눈은 언제 다 나아? "
"응... 눈에 나쁜 게 생겨서, 수술을 받으면 엄마의 오른쪽 눈도 영원히 없어지게 되는 거야.
엄마도 많이 무섭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용기 내 보기로 했어.
얼굴이 많이 달라져도, 무섭다고 도망가지 않을 거지? "
"엄마!
엄마는 눈이 하나여도
억억억억 조조조조 구천구백구십구로 예뻐! "
수술을 며칠 앞두고, 사진을 찍었다.
각 잡고 찍는 것이 어색해서 결혼 스냅사진도 생략했던 나지만, 이번만은 넘어갈 수 없었다.
안녕, 지금의 내 모습, 내 얼굴.
두 눈이 있다는 것만으로 평생 그리울 지금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