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채로 영원히—
두 번의 눈꺼풀 절개 수술과 조직검사.
두 병원, 두 명의 의사 선생님에게 받은 암 선고.
그리고 안구 적출술 권고.
이 모든 것이 2개월 동안 일어났다. 불운을 운반하는 신이 그만 발을 헛디뎌서 내 머리 위에 잔뜩 쏟았다 해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아무 일 없는 척 지내다가도
길을 걷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화장실에 들어가다… 혼자 있는 순간이 생기면 자꾸만 눈물이 났다. 병이 병을 낳는다더니.
내가 만약 아이가 없었다면, 혹은 미혼이었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외모를 크게 해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 나섰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무리한 수술을 받기보다는 남은 여생을 두 눈과 함께 즐기다 가는 방법을 택했을지도.
하지만 엄마란 게 뭔지.
수술과 방사선 치료 중에 고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른 건 하나뿐이었다.
우리 아이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인데.
아직 해 줘야 할 게 너무 많은데.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이 뭐지?
일본인 지인들에게 안구 적출술을 권고받았다고 하면, 그 병원 괜찮은 거냐며 다른 병원에서 세컨드 오피니언을 받아 보라고 했다.
나라고 생각 안 해 봤겠어? 이 상황에서 가장 절실하게 다른 의견을 듣고 싶은 건 나인걸.
하지만… 나에게 생긴 눈꺼풀암은 말로만 듣던 ‘희귀 암’이다. 일반 환자에서 희귀암 환자로 구분되는 순간, 많은 병원들은 손사래를 치며 유명한 암 전문 병원으로 가라고 이야기한다. 바로, 지금 내가 다니는 병원으로.
가족들은 그 일본 병원 괜찮은 거냐며, 한국에 와서 다시 알아보자고 했다.
나라고 생각 안 해 봤겠어? 당연히 내 나라에서 치료받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하겠지.
그러나… 한국은 때마침 의료 파업으로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감사하게도 지인들 중에 유명한 교수님을 소개해 준다는 이들도 여럿 있었지만, 막상 구체적인 일정 이야기로 들어가면 검사부터 수술까지 빨라도 서너 달, 길게는 1년 이상도 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임파선 전이가 몇 주, 몇 달만에도 진행될 수 있다는 말만 듣지 않았어도, 당장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을 텐데.
안과 진찰실에만 들어오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곳의 공기도 내 마음도 너무 무겁다.
"수술… 받으려고 합니다."
"큰 결심 하셨네요. 희생이 큰 만큼 확실한 법이니 잘 생각하신 겁니다."
"근데… 의안은 수술하고 얼마나 지나면 쓸 수 있나요? "
“아… 유감스럽지만 의안은 쓸 수 없어요. ”
"네?"
"원발부위인 눈꺼풀과, 그와 접해 있는 안구를 완전히 적출하면,
오른쪽 안와(眼窩:눈과 부속물이 위치한 구멍)에 구멍이 난 채로 살아야 합니다. "
안구 적출이라는 말에 꽂혀 가장 중요한 눈꺼풀을 잊고 있었다. 지난 병원에서도 눈꺼풀은 재건수술을 받으면 된다고 했었는데…
처음부터 수술 후의 모습을 자세히 알려줬다면 혼자 착각하지 않았을 텐데. 미리 이야기하면 충격받을까 봐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건가? 아직도 설명하지 않은 사실이 한참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숨 막힌다, 하나하나가.
"평생 안대를 끼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에피테제라는 걸 쓸 수도 있습니다. 인공 손가락처럼 반대쪽 눈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서 부착하는 거예요 "
작은 유리 케이스에서 꺼낸 에피테제란 정말 놀라웠다. 눈을 마주치기가 무서울 정도로 진짜 눈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다 한 들, 움직일 수도 깜빡일 수 없는 인공 눈. 잠시 눈을 감고 싶거나 웃고 싶을 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나의 눈빛을 읽은 걸까. 주치의 선생님은 다시 4일 동안 고민해 보고 이야기하자고 했다.
한 번의 결심을 하는 것도 살점을 도려내는 듯 아팠는데, 그 고통을 또다시 되풀이하라니.
이 방에서 나누는 모든 이야기가 버겁다.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뛰쳐나가, 멀리 도망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