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터지다! 아이의 말
일본에서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유학생을 위한 언어학 특강 수업을 듣고 있었다. 한 중국인 유학생은 그날따라 일본어가 잘 나오지 않았는지, 교수님과 학생들에게 연신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일본어가 생각이 안 나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교수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일본어뿐 아니라 모국어, 사람에 따라서는 영어나 제3, 제4의 언어까지, 뇌라는 언어 공장을 두세 배로 가동하고 있는 겁니다. 예열이 필요한 게 당연해요. 자부심을 가져요. "
'맞아. 이중언어인데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지!
열심히 잘하고 있어, 나 자신. '
아이와 한 시간에 가까운 '걸어서 등하원'을 시작한 지 어느덧 석 달째.
아침부터 35도를 오르내리는 날에는 휴대용 선풍기 세 대를 들고 걸었고, 태풍이 잇따라 몰아치던 시기에는 캠핑용 비옷을 입은 채 바람에 떠밀리는 대로 걸었다.
평소보다 일찍 설정해 둔 알람이 울릴 때마다, 조금 더 자고 마마차리로 갈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아이의 작은 변화들이다.
"죠죠야, 오늘은 인형 많은 집 앞으로 갈까? "
"응! "
"저기에서 뭐가 제일 좋아? 미키? 도널드? "
"아니! 저거! 아기! "
"어떤 거? 작은 푸? "
"응! 좋아! "
아이는 아주 서서히, 조금씩 간단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응, 아니, 이거, 저거, 좋아, 싫어... 언어 퇴행이 나타나기 전에도 이 정도의 대화는 할 수 있었으니, 정확히 반년만에 돌아온 의미 있는 대답이다.
달라진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던 반향어도,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던 모습에서 스스로가 한 말을 한 번 더 되뇌는 식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소리는 아주 조금씩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아침저녁으로 더 열심히 걷고 더 많이 이야기하면서, 아이가 말할 수 있는 단어도 나날이 늘어갔다. 숫자, 색깔, 꽃, 나중에는 화과자의 종류와 이름까지. 작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가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이 참으로 반가웠다.
하지만 그 반가움의 뒤편에는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만 세 살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이의 말은 꽤 오랫동안 서너 글자 이내의 단어에 머물러 있었다. 애써 비교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린이집 또래들과 마주할 때마다 그 차이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ジョジョちゃんのママ!
ジョジョちゃんはなんで赤ちゃんみたいにしゃべるの? "
(죠죠짱 마마! 죠죠짱은 왜 아기처럼 말해요? )
푹푹 찌던 무더위가 물러가고, 도쿄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동네 구석구석을 돌고, 당연한 듯 화과자점에 들렀다.
"죠죠야, 오늘은 센베이(煎餅:일본전통과자) 먹자. "
"센베이 아니야! 모찌(餅:떡) ! "
"매일 떡만 먹어서 엄만 질렸는데. "
"싫어, 떡! "
"왜~ 다른 거 먹자. "
"마마,
나는, 모찌, 가, 진짜 다이스키*니까! "
*다이스키(大好き):좋아하다.
놀랐다. 한국사람인 나도, 일본사람인 점장 할머니와 손님으로 와 있던 아주머니도.
한국어인지, 일본어인지 알 수 없는 말. 하지만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고 또 맴돌다가 밖으로 나왔을 아이의 문장.
'뇌라는 언어 공장을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 세 배로 가동하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
내가 기다릴게. 그리고 잘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