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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걸음. 우리 동네 인기쟁이(人気者) (1)

말은 못 해도 표현은 할 수 있으니까

by 모모


150-80-30-20-10… 10분

아니, 때로는 5…혹은 0.


둘 다 회사원인 맞벌이 부부가 평일에 아이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아침에 일어나서 집을 나설 때까지 한 시간, 어린이집에 다녀와서 잠에 들 때까지 두 시간, 많아 봤자 세 시간 정도다. 그중의 반 이상은 식사, 목욕… 남은 시간도 뒷정리를 하고 어린이집 짐을 챙기다 보면 끝. 이 정도면 아이를 '키운다'라기보다는 같이 밥을 먹고 자는 정도의 관계라는 것이 정확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하루 수십 분의 등하원 시간은 무척 귀하다. 나갈 준비, 잘 준비 따위에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랄까.

연애할 때에는 연인과 일 분 일 초도 떨어지기 싫어서 같이 이동하고,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도 했는데. 왜 아이에 대해서는 이동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활용할 생각을 못했을까.




" 또 걷게? 마마차리로 편하게 가지 "

"응, 좀 더 해 보려고 "


본격적인 '걸어서 등하원'이 시작됐다.

어차피 오래 걸리는 거, 아예 출발 시간을 30분 일찍 앞당겼다. 자는 시간도 부족한 워킹맘이 여유 있게 일어나 집을 나선다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다. 홧김에 아이와 걸어서 등원했던 날, 세상 신나 하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늘 느끼는 거지만, 도쿄 주택가의 골목길은 한국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차 한 대도 겨우 들어갈 법한 좁고 긴 골목길, 아담하고 촘촘한 집들, 옛날 영상에서 튀어나온 듯 작고 오래된 가게들. 인적이 드문 아침 시간은 이런 골목 구석구석을 구경하기에 딱이다.


"죠죠야, 저기 어제 봤던 고양이다! 안녕, 냐옹아 "

"저기 화분이 하나, 둘, 셋… 열두 개? 그새 한 개 늘었네! "

"항상 있던 분홍색 자전거가 어디 갔지? 여기 사는 언니가 오늘은 일찍 나갔나 봐 "


아이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 하나하나를 중계하듯, 나는 쉴 새 없이 말하고 또 말했다. 마치 3분의 침묵도 허용되지 않는 라디오 방송처럼, 빈틈없이.

아이의 말도 반향어도 아직 제자리걸음이지만, 함께 걸으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 코로나 중에 놓쳤던 세상을 이제라도 머릿속에 모아 담듯이, 길에서 보고 듣는 것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귀 기울여 준다는 것.


'내가 말해주는 것들이 어디로 가지는 않을 거야. 아이의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때가 되면 한 번에 밖으로 나오겠지?

아무리 부산스럽고 시답잖아도 좋으니, 우리 아이가 말할 수 있게만 해 줘! '




아침 등원길이 동네를 순찰하는 코스라면, 저녁 하원길은 동네 사람들의 안위를 살피는 코스다.

매일 저녁 동네 골목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자주 마주치는 얼굴들이 생겨났다. 길고양이에게 밥 주는 아주머니, 가게 문을 닫고 나오는 할머니, 늘 같은 공원을 산책하는 할아버지…

처음에는 멀찍이서 바라보는 정도로 그쳤다. 하지만 얼굴이 익으면서, 아이가 먼저 손인사를 하고 가까이 다가가는가 싶더니, 어떤 날은 옆에 자리를 잡고 앉기도 하고, 뭐라고 속닥대거나 시시덕거리기까지 했다. 말도 못 하면서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그중에는 우리 아이를 유난히 예뻐해서, 딱히 일이 없는 날도 같은 시간에 나와 아이를 기다려 주고, 사탕이나 젤리를 잔뜩 챙겨다 주는 어르신도 있었다. 내가 10년 넘게 경험해 온 도쿄는 좀 더 건조하고, 동네 이웃끼리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미덕인데. 우리 아이의 세상에는 또 다른 도쿄가 있는 것 같다.


"죠죠야, 감사합니다 해야지.

죄송해요, 실은 아이가 말이 많이 늦어서… "

"괜찮아요.

우리는 말 안 해도 통하니까, 그렇지? "



동네 사람들을 순서대로 만나고 나면, 마지막 의식처럼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가게들을 둘러보며 집으로 향한다. 아이는 여느 때와 같이 마지막 골목에 있는 화과자점(和菓子屋:일본 전통 화과자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유리창 너머로 형형색색 예술작품과도 같은 화과자들을 구경했다.

오늘따라 좀 오래 서 있는다 싶어서 이만 발을 옮기려는데, 아이는 가게 할머니와 눈빛을 몇 번 주고받더니 말도 없이 가게로 쑥 들어갔다.


"아, 저기 이발소 사장님이랑 친한 아이 맞죠? 자주 봤어요.

공주님은 어떤 걸 좋아해? 떡? 만쥬? 센베? "


아이는 무언가 말하듯 나뭇잎으로 말아놓은 떡을 가리키며 할머니를 바라봤다.

"응 그건 쫀득쫀득한 카시와모찌(柏餅:가랍떡)야 "

아이는 흥미로운 듯 또 다른 과자를 가리키고 할머니가 알려주고, 묻고 알려주고 묻고… 다양한 종류와 모양의 화과자가 재미있는지, 한참을 그러고 놀았다. 말은 못 해도 표현은 할 수 있다는 게 이런 건가?


빈 손으로 나올 수 없어서, 아이가 가장 오래 바라봤던 장미 모양의 죠나마가시(上生菓子:계절을 색과 모양으로 표현한 고급 생과자)를 샀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것보다도 더 비싸 보이는 간지 사탕(干支飴:십이지신 동물의 얼굴이 들어간 사탕) 한 통을 넣어 주셨다.


"우리 동네 인기쟁이(人気者), 또 언제든지 놀러 와! "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죠나마가시 '바라(バ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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