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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걸음. 다 싫으면 걸어가!

미안해서, 화가 나서,

by 모모


회사 입사 동기들과 점심식사를 하던 날, 한 명의 휴대폰 배경에 있는 문구를 보고 흠칫했다.


罪悪感こそ
最強の原動力!
(죄책감이야말로
최강의 원동력!)


“이거 너무 비장한데? 좌우명 같은 거야? ”

“음… 좌우명보다는 자기 주문에 가깝지 ”

동기는 평소에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성격이라, 죄책감을 피할 수 없다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져가자는 자기와의 약속이라고 했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란 곧 우울로 바뀌어서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라면서.

그때 죄책감을 원동력으로 바꾸는 방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어 둘 걸 그랬다. 남의 일인 듯, 나르시시스트냐며 놀려대지만 말고.




아이의 언어 지연이 확실해진 후로, 나는 자책과 죄책감의 늪에 빠져 버렸다. 일에 쫓겨서 아이의 중요한 변화를 놓친 것, 언어 지연임을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감—그것들이 내 어깨를 한껏 짓눌렀다.

버거운 하루 위에 어둠 한 장을 더하듯,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면 보육사 선생님들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어머님, 오늘 죠죠가 친구를 좀 세게 밀었어요 "

"물건을 안 놔주고 당기다가 친구를... "

"죠죠가 장난감을 휘두르다가… “


등원이 다시 시작되면 모든 게 좋아질 거라던 예상과 달리, 아이는 날로 예민해졌다. 친구들의 말이 길어지면 금세 짜증을 내고, 말을 이길 수 있는 건 힘밖에 없다고 느꼈는지 밀거나 누르거나 휘두르는 일이 많아졌다.

회사에는 아이 걱정에 일에 집중을 못해서 미안하고-어린이집과 친구들에게는 예민한 아이 때문에 미안하고- 아이에게는 내가 이렇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고- 능력 없는 워킹맘은 어디서든 대역죄인이다.

"원장 선생님, 우리 죠죠가 요즘 문제 되는 행동을 자주 하네요. 죄송합니다. 집에서도 잘 지도하도록 하겠습니다 "

"언어 수준 차이가 많이 나는 시기에는 흔한 일이에요. 본인도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말만 트이면 훨씬 나아질 거예요 "


맞다. 말을 못 해서 가장 답답한 건 내가 아니라 아이 본인일 것이다. 원장 선생님은 나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이런 고충을 두 살짜리 아이가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다 생각하니 나의 죄책감은 점점 더 깊어졌다.

'말만 트이면 나을 텐데, 말이 트이질 않아요, 선생님.

다 제 탓이에요 '


회사 동기의 말처럼 죄책감을 긍정적인 원동력으로 승화시켰어야 했는데. 길 잃은 나의 죄책감은 깊은 우울감으로 바뀌어 갔다.



어린이집 등원이 재개된 지 두 달.

아이는 여전히 의미 있는 말을 하지 못하고, 대답대신 반향어를 반복한다.


'말이 이대로 늘지 않으면 어쩌지? 또래들과 1년, 2년… 차이가 점점 벌어지면? 넋 놓고 일본에서 이러고 있는 게 맞는 건가? 빨리 한국에 있는 발달센터에라도 데려가야 하나? 그러면 일은 어쩌지? 지금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일을 쉴 수도 없는데... 나는 왜 이리 이기적일까? '


끝이 보이지 않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낮에도 마찬가지였다. 밥을 먹다가도, 일에 몰두하다가도, 불현듯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말이 통하지 않아 예민한 아이와 우울한 엄마. 이 불행한 조합은 외출 한 번 한 번을 전쟁으로 만들었다.


"죠죠야, 출발하자. 여기 헬멧 "

"헤매! 헤매! 아아아아! “

"헬멧 빨리 안 쓰면 마마차리 못 타. 오늘은 유모차로 갈 거야? "

"가까야? 히어 어어! 아아앙 “

"대체 어떻게 하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제대로 말을 하던가! "


금방이라도 어린이집 가방을 내동댕이치고, 아이에게 고함을 지를 것만 같았다.


"됐어! 다 싫으면 걸어가! "


아이의 헬맷을 든 채 뒤도 안 돌아보고 걸음을 옮겼다. 아이도 뭔가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훌쩍거리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지키며 뒤따라왔다.

어린이집까지는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 도중에 징징대며 다리가 아프다, 안아 달라, 업어 달라를 시전 하겠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택도 없다. 나도 지쳤어.


아이의 훌쩍거림과 발소리에 귀 기울이면서도, 신경 쓰지 않는 척 앞만 보며 걷고 또 걸었다. 중간쯤 갔을까. 순간 뒤에서 들리던 소리가 멈췄다.


'그래, 슬슬 힘들다 이거지. '


살며시 뒤돌아보니, 아이는 담벼락에 앉아 있는 길고양이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고서.


'나만 괜찮으면 다 괜찮은 거였구나 '


아이는 내가 다가온 것을 눈치채고는 고양이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음으로 답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나 혼자 아이와 기싸움을 한 것 외에는.


"죠죠야, 저기도 냐옹이 한 마리 더 있어! 가 보자! "




처음으로 아이와 오롯이 걸어서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빠른 길로 15분이면 갈 길을 골목골목 다 들리느라 50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도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거나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세상 신난 얼굴이었다.

아침부터 중요한 미팅에 지각하는 바람에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평온했다.


'내일도 걷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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