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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Z 교장 Apr 18. 2023

냄비 라면 사용법

응징과 보복 그 어느 지점에 내가 있었다.

오늘처럼 비만 오면 생각나는 군대 시절의 악몽이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말하고 싶지 않은 나만의 비밀이다. 일명 '냄비 라면' 사건이다.


 




"야! 유재석(가명) 이병!"


"이병 유재석!"


"조용히 해 쉐끼야, 애들 깨잖아. 지금 빨리 취사실에 가서 라면 하나 끓여 와. 계란 노른자 풀어서..."

출처 : 구글 이미지




훈련병 딱지를 갓 떼고 자대(실제 군생활 하는 부대) 배치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이등병 시절의 에피소드이다.


나는 해안경계를 맡은 부대에 배치됐는데 육지에서 3개월 훈련을 받은 후 3개월 간 섬에 들어가 북한군의 침투를 막는(?) 업무를 하는 부대였다(군사기밀인가?).

혹자는 38선 인접의 전방 부대에 배치되지 않고 후방 부대에 배치되어 군생활을 편하게 했겠다고 할 수도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무래도 후방 부대에 있어 위험도나 긴장감은 전방보다 덜 하지만, 후방 부대 특히 섬에서 3개월 간 해안경계를 서는 부대는 달랐다. 지금 군대는 절대 그렇지 않겠지만 가혹행위가 엄청 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버텼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시에는 당연히 군대는 그런 줄 알았던 것 같다.


섬에서의 해안경계는 낮과 밤이 바뀐다. 밤에 초소에서 경계를 서고 낮에 잠을 잔다(오침). 고참들은 밤에 따뜻한 상황실에서 경계를 서고 졸병들은 선임병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 경계를 선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slangext3/60165136558



우리 부대에는 강호동(가명) 병장이 있었다.

이 병장은 키가 180cm 넘었고 다부진 체격을 지녔다. 진짜 강호동처럼 생겼는데 본인 말로는 사회에서 조폭이었다고 한다. (군대에서 하는 말은 확인할 방법이 없어 거의 거짓말이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강 병장의 먹성이 지금의 쯔양만큼 대단했다는 것이다. 섬에서 복무하기 때문에 제공되는 부식(군인들이 먹는 식재료)이 엄청 많고 다양했다. 강 병장에게는 아마도 섬 생활이 천국이었을 것이다.

강 병장은 거의 매일 막사에서 야간 근무를 자진하여 섰다. 동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벽마다 졸병들이 끊여다 바치는(?) 라면을 먹기 위해서이다.



늘 하던 대로 강 병장은 힘들게 초소에서 새벽 근무를 마치고 온 내게 라면을 끓여 오라고 명령(?)했다. 꼭 계란 노른자를 풀어서라는 단서를 붙여서.


그날은 오늘처럼 비가 억수로 많이 왔다. 이런 날은 라면 끓여서 가져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섬이어서 취사실로 가려면 막사에서 50m를 비바람을 맞으며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3시에 취사실로 내려가 육개장 사발면 3개와 계란 1개로 라면을 끓였다. 당시에는 봉지 라면이 없어 육개장 사발면으로 냄비 라면을 끓여야만 했다. 강 병장은 계란 흰자는 먹지 않고 노른자만 먹었다. 그래서 계란에서 노른자만 잘 분리를 해야 했다. 당시 우리 졸병들은 초소에서 해안경계 근무를 서는 것보다 새벽에 강 병장의 라면을 끓여 갔다 바치는 것을 더 힘들어했다. 더 괴로워했다.



나는 라면을 다 끓이고 냄비를 들고 취사실에서 막사로 걸어갔다. 그런데 순간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흘렀다. 비바람 몰아치는 새벽 3시에 냄비를 들고 걸어가는 나 자신을 보니 처량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고 사랑스러운 남자친구인데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꺄~아~악 퉤. (one more time) 꺄~~퉤"

출처 : https://kokone.co.kr/524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런 막 돼먹은 행동을 하다니. 당시 나는 사범대 윤리교육과에 다니다가 군대에 왔다. 장차 아이들에게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려는 예비교사가 누군가 맛있게 먹을 라면에 노오란 가래를 뱉고 있었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노오란 계란 노른자와 내 가래는 이미 한 몸이 돼 있어서 누가 노른자이고 누가 가래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깨고 보니 장자가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된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태연하게 강 병장에게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라면 한 그릇을 고이 모셔 드렸다. 강병장은 비바람 천둥 치는 그 새벽에도 게걸스럽게 라면을 먹었다 마셨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강 병장이 나를 불렀다.

나는 다 먹었으니 빨리 치우라는 말일 거라 생각하고 강 병장에게 달려갔다.


"유재석 이병!"


"이병 유재석"


"오늘따라 이상하게 입 맛이 없네. 유 이병 배고프지? 오늘은 특별히 너를 위해 라면 다 먹지 않고 남겼으니 빨리 식기 전에 다 먹어!"


"아아~ 아닙니다. 저는 괜찮지 말입니다. 다 드시지 말입니다."


"쟈식, 괜찮아? 그동안 새벽에 라면 끓이느라 고생 많았어.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얼른 먹어"



강 병장이 남겨 준 라면에는 누가 노른자이고? 누가 가래인지? 모를 노란 덩어리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나는 강 병장이 보는 앞에서 물아일체의 라면을 맛있게 먹어야만 했다.


혹시 모를 완전범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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