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쓴 이야기보다 짧은 시 한 편이 더 많은 감동을 줄 때가 있음을 깨닫는다.
마치 같은 피사체를 찍었는데 어떤 사진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 반면, 어떤 사진은 200자 원고자 10장 분량의 메시지를 주는 것처럼.
오늘 아침 출근길 7시.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춰 있는 그 짧은 순간에 내가 본 장면은 등장인물과 소품은 단출하지만 내게 주는 삶의 이야기는 한 편의 짧은 TV 문학관이었다.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 위에는 작은 컵라면과 소주 한 병 그리고 스마트폰이 놓여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는 초점 잃은 눈빛으로 도로 위 지나가는 차들을 쳐다보고 있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아침 7시 편의점에서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어떤 애절한 삶의 이야기가 있길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저런 모습으로 나와 마주했을까?
사진작가였다면 카메라 앵글에 담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 장면은 내 머리와 가슴에만 남아 있다.
3분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편의점 앞 그 남자의 지난 일을 추적한다.
아마도 지난 새벽 대리기사 일을 했을 거라 결론내린다.
남들이 모두 출근하는 시간에 아침식사로 컵라면과 소주를 마신다면 오전에는 출근하지 않는 사람이 분명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스마트폰은 새벽 내내 술 취한 사람들이 그를 호출하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고, 편한 운동화는 이곳저곳 바쁘게 뛰어다녔음을 짐작하게 한다.
두꺼운 외투 안에 파란색 와이셔츠를 입었다.
와이셔츠를 입은 걸 보니 오후에 출근하여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직업을 가져 투잡을 뛰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오후에 출근하여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저녁부터 새벽 내내 대리기사를 뛰는 사람.
조금 자란 턱수염이 투잡을 뛰는 사람임을 증명한다. 밤에 대리기사만 하는 사람이라면 수염을 깍지 않아도 돼, 수염이 많이 자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경 너머 보이는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새벽 내내 빨간 브레이크 등을 쳐다보느라 피곤에 지친 눈이다.
그렇게 고된 일을 했을 텐데 그래서 그만큼 배가 많이 고팠을 텐데 큰 용량의 컵라면이 아닌 작은 사이즈의 컵라면을 먹는다.
"혹시 돈을 아끼려고 그랬을까?"
남자의 마음이 읽혀져 순간 내 속이 쓰린다.
진로소주 한 병이 놓여 있는데 자세히 보니 뚜껑이 빨간색이다.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안다. 두꺼비 소주 중 뚜껑이 빨간색은 오리지널 21% 소주란 걸. 나도 소주를 좋아하지만 빨간색 진로는 잘 먹지 않는다. 독한 소주를 마실 정도면 분명 한 병으로 성이 안 찰 텐데 이 또한 돈을 아끼려고 독한 소주를 골랐을 거라 생각하니 오히려 내가, 과음한 다음날의 숙취가 느껴진다.
소주를 마실 종이컵도 없다. 그냥 병 채 마실 요량인가 보다.
뒤에서 빵빵 거리는 클랙슨 소리에 깜짝 놀라 앞을 보았다. 이미 신호등이 바뀌어 차들이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이 나는 마치 카메라의 슬로모션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순간을 다시 되돌리기를 해보니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를 의식했으나 그 사람은 나를 의식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 의식했을 수도 있다.
그럼 그 사람의 의식에 나란 존재는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