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고나 2024년 9월 13일 금요일
트라우마(trauma)라는 말은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단어이다.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는데 본래 의미는 '큰 상처'이다. 과거에 경험했던 공포, 충격, 상실과 같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순간이 갑자기 떠올라서 당시의 감정을 느끼면서 심리적 불안을 겪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적 상처와 정신적 상처 모두 해당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정신적 외상만을 가리키는 말로 인지되어 의미가 좁혀져 널리 쓰이고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아동학대, 가정폭력, 학교폭력, 언어폭력, 성폭력과 같은 행위를 당할 경우 이와 같은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일반적인 상처는 자연적으로 치유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의 큰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고 계속 그 순간이 생각나게 되고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면 마치 지박형 귀신같은 모양새가 되는데 현재를 즐길 수 없으니 삶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라는 말이 지나치게 남발되는 경향이 있긴 한데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절대적인 기준은 없는듯하다. 필자만 하더라도 고양이 별로 떠난 지 반년이 된 '뀨'를 잊지 못하고 하루하루 상실감과 죄책감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혹자가 보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보다 못한 반려동물에 이와 같은 감정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표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고양이 뀨는 그냥 가족 그 자체였다. 인간이냐 고양이냐 급을 나누고 편 가르려고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가지런히 놓고 동등하게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9월 12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 살인으로 징역 100년형을 선고받은 남자, 앤드류 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 땅을 밝은 이민가정에 닥친 비극적인 스토리가 소개되었는데 어처구니없는 부모님의 죽음과 함께 누나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모범생이 살인자로 전락하게 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절실하게 와닿았던 건 이와 같은 타인의 불행을 근간으로 한 자극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앤드류 서 입장에서 본 '그날'과 '가족에 대한 정의'였다. 먼저 '그날'의 경우 일요일 아침, 햇빛이 들어오고 바깥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며 음악이 들리는 순간을 진짜 나의 그날로 손꼽았다. 비극적인 삶은 살은 그에게 있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온한 순간을 그 누구보다 갈망하지 않았을까... 가족에 대한 정의를 들었을 때 사실 소름이 너무 돋았다. 내가 평소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저한테 가족이 무슨 의미냐고요?
가족은 저에게 절대적인 사랑이죠
가족은 저를 다치게 할 동기가 없는 사람들이죠
가족은 저를 사랑해 줄 사람들이죠
좋지 않을 때나 제가 기댈 수 있는 사람
또한 저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죠
가족은 항상 제 편인 사람들입니다
가족은 저를 항상 옹호해 주는 사람들이고요
반대로 제가 늘 옹호를 해줘야 할 사람들이에요"
딱 하나의 관점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가족을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고양이, 강아지와 같은 반려동물까지 확대해서 볼 수 있느냐 여부가 아닐까 싶다. 본디 급 나누고 편 가르는 본능을 가진 인간은 조건을 따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고양이 뀨는 처음부터 나만 바라봤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안겨줬었다. 가족에 대한 불신이 있던 나에게 가족이 무엇인지 알려준 소중한 존재였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뀨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단순히 한 장면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 꼬물이였을 때 모습부터 마치 잠을 자듯이 옆으로 누워서 숨을 거둔 모습까지 수많은 장면들이 한 번에 떠오른다. 생사의 기로를 선 순간에서나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장변을 기억하는 주마등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매일 뀨를 떠올리거나 연관된 것을 경험할 때마다 뀨의 빈자리를 느끼고 고통을 겪고 있다. 항상 나만 바라보고 내 편이 되어준 뀨를 지켜주지 못한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리석고 우둔한 헛똑똑이 고양이 집사의 그날은... 바로 내가 고양이 삼 남매가 다 같이 침대에 누워서 눈을 마주하고 몸을 부대끼다가 잠을 자던 순간이다. 이제야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 어리석은 집사는 예전처럼 남아 있는 10살 터울의 고양이들과 함께 잠을 자고 있는 중이다. 생전에 뀨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알려줬다면 생후의 뀨는 그날의 소중함을 알려줬다.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날이 과연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잘 돌봐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고 뀨와 함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