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에르쥬 Sep 20. 2024

이별을 겪은 고양이 집사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 3가지

별고나 2024년 9월 20일 금요일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다는 것...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자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공포의 순간이었다. 언젠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건 어느 정도 생각을 하고 있었긴 하다. 할아버지를 제외한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버니 모두 60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순간은 더욱더 가까이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바로 올해 3월 6살밖에 되지 않은 막둥이 고양이 '뀨'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것이다. 

비록 죽는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지만 지금도 너무 생생하게 그때가 기억난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털은 여전히 윤기가 가득했었다. 마치 곤히 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고 숨도 쉬지 않았으며 동공이 풀려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고 몸은 힘 없이 축 늘어져 있었는데 에너지가 넘치던 '뀨'의 생전 모습과는 너무 차이가 심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순간 도저히 '뀨'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코와 입이 시퍼렇게 질린 모습과 입에 침이 고여있는 모습 그리고 죽기 전에 오줌을 배출한 모습을 보니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반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렇게 뼈저리게 후회하고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상태인데 케어를 제대로 못해준 것과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부분이 그야말로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같다. 

'뀨'가 고양이 무지개다리 건넌 후 생긴 일종의 습관이 되어 버린 트라우마 3가지가 있다. 첫 번째 트라우마는 남은 고양이들이 자고 있을 때 혹시나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마냥 곤히 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무지개다리를 건넌 모습을 직접 목격하다 보니 데자뷔가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시감이 든다. 두 번째 트라우마는 물을 너무 급하게 먹지 않는지 살펴보는 경향이 생겼다. '뀨'가 화장실에서 크게 우는 습성이 있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료와 물을 너무 잘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뀨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본 결과 신장 질환으로 인해 전해질 불균형이 생기면 허겁지겁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살고 싶다는 처저한 생존 본능이었는데 나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건강하다는 신호로 오인한 것이다. 세 번째 트라우마는 구취를 확인하는 것이다. 뀨는 유독 사람을 좋아했었는데 특히 손가락, 발가락, 코와 같은 신체를 핥아주면서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여줬다. 죽기 전에도 이런 모습은 변화가 없었는데 유독 구취가 심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양치질을 해주기 위해서 이와 관련된 용품을 구매했는 데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아마 추측컨대 신장질환으로 인해 구취가 더욱더 심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과 무심함이 이와 같은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죽을 때까지 죄책감이 따라오게 되었고 '뀨'는 황망한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뀨'라는 이름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던 고양이 집사와 고양이는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 속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하지만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으로 그르렁그르렁 거리던 뀨의 모습을 보면 나와 함께 있을 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른 고양이와 달리 목베개를 하면서 옴몸을 맡기는 뀨의 모습을 보면 "지금 난 그토록 그리던 이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이라는 애틋한 감정이 충분히 전달이 되고도 남았다. 시각, 청각, 촉각 등 오감으로 애정을 표출하던 뀨였기에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큰 상처를 의미하는 트라우마가 따라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결국 고통은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억지로 극복하려고 하면 부러지기에 그 고통 속에서 견디며 천천히 회복해야 한다. 죄책감을 덜지 않으면서 오롯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 그래야 나중에라도 내가 죽은 후 뀨가 마중 나오면 해줄 수 있는 속죄의 말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이전 25화 고양이 집사의 그날을 생각하며 (ft. 꼬꼬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