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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Sep 19. 2023

벽을 허물었지만 선을 그었다

이제는 진짜 안녕


이 날 약속 있니?


냉장고 앞에 붙어있는 근무표를 한참 들여다보던 H선생님이 물었다. 저요? 의아하다는 대답과 함께 H선생님의 손가락 끝이 닿은 날을 확인했다. 그날은 선약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괜찮다는 대답에 술 한잔 할까?라는 말이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대답했다.


항상 공적인 장소에서만 접했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사적인 자리를 만들었다. 지금도 한 번씩 생각하고는 한다. 아마, 그날이 아니었다면 마음을 한 번에 여는 날은 아주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날 매콤한 오돌뼈와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에 새로운 인연의 끝을 만들게 된 사이에서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사람이 미워지는 것도 한 순간이지만, 친해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벽을 세우던 것도 잠시 그날 하루에 담겨있던 시간 속에서 세우던 벽을 모두 무너뜨렸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멀리하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람이 고팠던 외로웠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그 손길이 따뜻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잠궈놨던 문을 열면서 보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 공허했던 마음에 차곡차곡채우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늘 좋은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다만, 전처럼 그 안에서 상처를 받지는 않게 되었다. 내가 상처받지 않을만큼의 안전거리가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그만큼 친해지는 시간이 남들보다 느리다고 해도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한다고 해서 그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지 않을거라는 것도 알게 됐다.



때로는 그 선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처음에는 차갑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그 소리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서 상처를 받거나 주기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나는 조금 더 내가 자랐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 기대감을 내려놓되 그 사람을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벽만 허물었지, 그어놓은 선은 더 진해졌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 선 안으로 들어오는 건 내 허락이 있어야 해.





미세한 선이 항상 나와 누군가의 사이에 놓여있었지만, 그 선을 넘어오더라도 혹은 넘어오려는 시도를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밀어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터득한 사회생활이 오히려 그 태도를  티가 나지 않게 감싸주고는 했다.


그래서 더 한결 수월한 마음으로 관계를 새롭게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더 시간을 지나 익숙함 속에 자리잡아 4년이란 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추억이 가득할만큼 즐거움이 가득했다. 아마 컨디션이 좋았으면 지금도 계속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다만, 그럴 수 없었던 건 급격히 좋아지지 않던 몸 상태 때문이었다.





관계에서 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기 때문일까, 문득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선생님과 상의를 하고 학사를 위해 근무를 나이트 킵으로 변경했다. 나이트킵을 하게 되면 연차도 있기 때문에 오프 수가 많아져서 그래도 나름 좀 병행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나이트가 나랑 맞지 않는 근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이트 근무를 할 때면, 밤낮이 바뀌어버려서 충분한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 상태로 일을 해야했다. 그런데, 학사를 하겠다고 나이트 킵을 했으니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코로나 시기에 학업을 진행하니 더 조심스러워져서 스트레스를 받았던걸까. 결국 위장장애와 피부트러블까지 얻었고, 학사과정이 끝났음에도 얻었던 증상들은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가족과 상의를 하고 3교대를 더이상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나에게는 길고 길었던 8년의 생활을 마무리 하게 됐다.



다만, 나는 직장을 옮기면서 새로운 관계들을 잘 쌓아서 더이상 상처받지 않았다는 마음에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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