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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Sep 13. 2023

상처받기 싫어서 벽을 세웠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내가 널? 나는 기억에 없어

H선생님이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당시에 정말 너무 힘들었다며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말 그 당시 선생님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살도 많이 빠져서 허리가 정말 한 줌도 안 될 만큼 말랐었다.


내 기억에는 생생하게 남아있지만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안 날 수도 있죠. 그때 선생님 계속 바쁘셨잖아요. 근데 선생님이 제 프리셉터셨어요.


신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력직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던 그 시기에 병동에 적응을 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던 선생님이었다. 지금은 정말 친한 언니처럼 지내고 있는 분을 처음 만났던 그 시기는, 정말 아수라장이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어디 살아? 집이랑 병원이랑은 가까워?

남자친구 있니?

어느 부서에 있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들은, 질문하는 사람만 바뀔 뿐 토시하나 빠지지 않고 똑같았다. 그렇지만 그 어느 질문도 내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항상 단답식으로 끝나며 말이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다가오려는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여기까지만요. 그 이상은 들어오지 마세요.

친절한 미소만 입가에 담았다.


누군가에게 관심도 기대도 없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차곡차곡 벽만 세우는 상태였으니까.





새로 입사할 병원을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눈에 들어온 건 생각지도 못 한 거리에 있던 병원이었다. 길치라는 걸 또 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다니는 곳이었는데 병원이 있다는 걸 한 번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이 정도면 길치보다는 주위에 관심이 너무 없는 건가?


어쨌든 척관병원은 또 처음이지만, 신규 때 길지는 않지만 잠깐 일했었던 정형외과 병동의 기억을 떠올리며 지원서를 넣었다. 바로 오라고 할 줄 몰랐는데, 순식간에 간호부장님과 면담을 진행하고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나는 이참에 퇴사 후 이직을 하는 것이니 최소 그래도 일주일에서 한 달은 쉬고 싶었는데 세상에 3일 쉬고 바로 출근이라니.


그리고 병원에 출근한 순간 왜 그렇게 빨리 인력을 구하려고 했는지 병동 입사한 지 30분도 안 돼서 바로 이해했다. 정말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고 하더라도, 반이 기존에 있던 분이었고 반이 새로 입사한 분들이었다. 그 말은 결국 무슨 뜻이냐면 같이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2일 후에는 안 나오고, 3일 뒤에는 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정체 모를 혼란기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수선생님이 퇴사를 하셨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정말 태풍 속 한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다행히 일은 또 흘러가게 되어있다고, 그런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듯 정말 아주 제대로 적응하고 있었다.


다만 일에 적응하고 있을 뿐, 사람들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겉돌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전혀 아는 사람들이 없다 보니 나와 친해지려면 나에게서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나는 내 얘기를 편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아니 털어놓지 못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혹시나 전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까 봐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제3의 입장에서 투명한 벽을 세워두고 그 밖에서 맴돌 뿐 절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람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그 안에 들어가도 상처를 받지 않을지, 혹은 뒷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지. 그 안에서 친해지지 않을 이유들만 상기시키며 계속 뒷걸음치기 바빴다.


그러니 H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기억에 없는 것도 어쩌면 너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조용하게 출근해서 자기 일만 하고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더군다나 H선생님은 나 외에도 새로 입사하는 사람들을 계속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만 있었던 상태였으니 사람들의 기억이 오죽 섞였을까. 지금까지도 해탈한 얼굴로 일 좀 할 수 있게 가르치면 없어졌다면서 얘기하고는 했으니까.




그렇게 2달가량을 벽을 세우고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정말 단 하나의 문장이 곧 그 거리를 단숨에 좁혀버리게 만들 줄은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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