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상사의 유형을 멍.게, 멍.부, 똑.게, 똑.부의 4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빡센 상사는 ‘똑.부’라고 생각한다. 똑똑한데 부지런하기까지 하면 여기저기서 일을 끌어오는 것은 기본이요, 재촉은 필수, 잦은 호출과 피드백은 옵션이기에 함께하기 가장 어려운 상사라고 생각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캐논이라는 카메라 회사에서 만난 상사가 ‘똑.부’에 해당하는 분이었다. 승진 욕심도 많고, 일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늘 최선을 넘어선 최고의 결과를 가져가야 겨우 일이 진행되었다. 반려가 생활의 일부였고, 수정 보완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런 상사가 유일하게 돈 터치, 돈 워리 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내가 기획한 행사들을 검토할 때였다. 특히 매년 1박 2일로 진행하는 사내 워크숍 행사를 검토할 때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니?’
‘진짜 재미있을 것 같다’
‘나도 진행팀에서 빠지고 참가자로 갈까?’
등으로 연신 칭찬을 쏟아내며 좋게 평가 해주셨다.
사실 캐논에서 진행하는 워크숍은 그리 달가운 행사는 아니었다. 워크숍 내용도 체육대회, 산행, 해병대캠프, 도미노와 같은 프로그램이 전부였고, 일정이 금~토로 진행되다 보니 직원들 입장에서는 ‘회사도 싫은데, 워크숍은 더 싫어’ 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만했다.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담당자로서 고민은 깊어 갔고, 오랜 고민과 노력 끝에 캐논의 워크숍은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직원들이 기다리는 행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심지어 입소문을 타고 다른 회사에서 벤치마킹도 해갔고, 어떤 회사는 심지어 3-4천 만원의 비용을 주고 워크숍 행사 대행을 의뢰하기도 했다. 직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가끔 퇴사하는 직원들이 따로 인사를 하러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과장님 덕분에 추억 많이 쌓았습니다”
“진짜 어디 가서 자랑하고 싶은 워크숍이었어요”
“다른 회사 가서도 꼭 추천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과연 캐논의 워크숍은 어떻게 직원들이 극혐하는 행사에서 애정하는 행사로 바뀔 수 있었을까? 기억 저편에 숨어있는 오래전 기억들을 꺼내서 나름의 성공요소를 4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행사에 재미를 더했다. 밋밋한 행사가 아니라 다양한 쇼와 예능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워크숍 조 배정은 월드컵 추첨 방식으로 긴장감을 더했고, 이동은 단체 버스가 아닌 조별로 렌탈한 스타렉스를 타고 집결지로 이동했다. 중간 중간 미션을 부여해 긴장감을 유지했고, 최종 미션은 여행지 소개 PT 만들기, 영화 만들기 등으로 난이도 있는 과제를 부여해서 직원들의 도전 정신을 이끌어 냈다.
둘째, 디테일하게 관리했다. 행사는 방심하는 순간 사고가 나고 한 순간에 무너진다. 또한 다른 기획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라이브로 진행된다. 일단 행사가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다. 시간 단위, 분 단위로 이루어지는 행사의 흐름에 대한 디테일한 관리가 필요하다. 겉으로 보여지는 프로그램은 시간대 별로 관리했지만, 그 안에서는 분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관리하고 행사장을 발에 불 나듯이 뛰어다녔다.
셋째, 사후관리도 진행했다. 행사가 끝나면 직원들은 이내 현업에 적응해가며 힘들게 준비한 행사에 대한 기억은 자연스레 사라져 간다. 이런 망각을 추억으로 돌려주고자 행사 후기 업로드, 포토 컨테스트, 워크숍 추억 영상 업로드, 사진첩 제공 등으로 행사의 여운을 오래오래 남겨 두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사의 컨셉을 짜서 행사의 매력도를 높였다는 점이다. 팀별로 영화를 만들고 다같이 대형 운동장에서 감상하는 워크숍의 컨셉은 ‘캐논 무비스타, 달빛아래 영화 감상’으로 했다. 팀별로 강원도 곳곳을 여행하며 소개 자료를 만드는 워크숍의 컨셉은 ‘포토 앤 트립, 그곳에 가다’ 로 했다.
컨셉을 활용한 기획은 다른 행사에서도 빛을 발했다. 팀별로 밤샘 아이디어 작업을 통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다음날 아침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아이디어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워크숍을 진행한 적이 있다. 이 행사의 컨셉은 ‘쇼 미 더 크레이티브’였다. 새로운 사장님의 취임식 행사에서는 전임 사장님이 격려사를 하고 새로운 사장님이 바통을 이어받아 취임사를 하는 행사였고, 컨셉을 ‘오작교, 과거와 미래를 잇다’ 로 잡았다. 10주년 행사는 10이라는 숫자를 모티브로 가져와서 10년간 회사를 이끌었던 성공 요소를 찾아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는 뜻으로 ‘10개의 D.N.A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이라는 컨셉으로 진행했다. 전직원 워크숍, 신임사장 취임식, 10주년 기념행사라는 밋밋한 내용보다 그 의미가 살아났다.
행사는 늘 부담이 컸던 기획으로 기억된다. 고객이 내부 직원들이기에 그 여파가 컸기 때문이다. 잘하면 본전, 못하면 개망신이 정설이다. 하지만, 부담이 큰 만큼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능프로그램에서 아이디어를 더하고, 디테일 하게 관리하고, 끝나도 끝난 게 아니고, 매력적인 컨셉을 더한다면 행사는 그 어떤 기획보다 재미있고, 나의 기획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될 것이다.가끔 오래전 캐논에서 행사를 진행했던 사진을 보면 그 누구보다 치열했던 기획자 임영균으로서의 생생함이 느껴진다. 그래 나도 한때는 열정적인 기획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