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과거와 현재가 겹친다
길 것만 같았던 여름방학도 하룻밤 잘 자면 아침이 오듯이 근수와 재덕의 방학도 지난밤 꾸었을 법 한 짧은 꿈의 시간처럼 지나가고 있다.
그중 어느 날 재덕이 별말 없이 늦게 온 날이 있었다. 짧지만 길게 기억된 아침이었다. 근수는 늘 둘이서 함께하던 아침이 쓸쓸하기만 하다. 꼭 이런 날은 일이 많다. 마침 갈아 놓은 원두가 없어 여 사장님이 일러주신 대로 5가지 정도의 원두를 비율에 맞게 원두분쇄기에 넣고 갈고 있다. 언제 맡아도 좋은 원두향이 이 시간의 피곤함을 달래주고 있다. 근수의 속 마음처럼 시끄럽게 갈리던 원두분쇄기가 멈추었다. 근수가 원두 가는 향에 빠져드는 것처럼 새롭게 내리는 커피 향에 이끌리듯 커피손님이 들어온다. 부드러운 인사와 물 한잔을 테이블 위에 올리자 속전속결의 커피주문을 한다. 이제 어제 커피잔을 뜨거운 물에 삶아 둔 잔을 다시 따뜻한 물로 데운 뒤 갓 내린 커피를 담는다. 겨울에는 상시 뜨거운 물에 잔을 담가 둔다고 여 사장님이 말해 주셨다. 향기에 다시 한번 취해 바쁜 몸을 움직이고 있다. 어제 처음 여 사장님이 근수를 몰래 불렀다. "커피를 내리기 전에 이것을 넣어야 된다. 그러면 커피의 풍미를 더 해 준다"며 근수에게만 살짝 말해 주었다. 의문의 가루는 무엇이었는지 여 사장님만 쓰는 서랍에서 꺼내와 스치듯 보여 주었다. 수동적인 아르바이트생이 시키는 일만을 하는데 왜 저런 중요한 것을 일러주었을까? 근수는 하루 종일 어제의 일이 머릿속을 맴돈다. 커피숍 안의 조명이 어두워 급히 넣는 바람에 궁금 증만 더 해 가고 있었다. 믿어 주는 것 같아 감사하기도 했다. 문득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인 것 같았다. 그만큼 노력하고 애쓰는 모습이 성공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지금의 이런 생각들이 50대인 나의 생각인지 그때 근수가 느낀 생각이었는지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고 있다. 그 의문의 가루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라는 말로 대신해야겠다.
재덕이도 출근하고 시간이 흘러 마감시간이 되었다.
여 사장님이 화난 목소리로 근수와 재덕이를 부른다. "오늘 마감한 돈의 액수가 틀리다고 돈이 다 맞지 않으면 퇴근하지 말라며" 버럭 화를 낸다. "도대체 얼마 나가 비는 거야?"근수와 재덕이 낮은 목소리로 여 사장님의 눈치를 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나눈다. 여 사장님이 잔 돈 몇 십원이 빈다고 이렇게 뭐라고 할 줄은 몰랐다. 몇 번이고 근수와 재덕이 지폐부터 동전까지 다시 계산해 보고 있다. 근수와 재덕이는 아마 이렇게 돈을 벌면서 잔돈 몇 푼으로 사람을 의심하고 몰아세울 줄이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람이 사람을 변하게 했는지, 돈이 사람을 변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참 야속하고 괴로웠을 것이다. 재덕이 "아! 맞다 어떤 손님이 급히 전화를 쓰신다고 하시며 전화를 쓰셨는데 전화비를 잊고 가신 듯하다"라고 한다. "그럼 사장님! 이제 돈이 맞는 것이지요?"라고 물었다. "그러면 맞다고 하시며 정신을 어디다 두고 그러냐"며 야단을 친다. 재덕이 눈물을 글썽이며 이내 고개를 숙인다. 그나마 다행히 찾아낸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안도한다. 여 사장님 왈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월급에서 뺀다고 말한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둘은 아무 말이 없다.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볍지 않게 때론 진중하게 시작했던 아르바이트였을 텐데. 시대를 앞서가기 위해 자신의 일처럼 작은 것에도 신경을 쓴 것들은 온데간데없이.... 근수와 재덕이는 얼마 남지 않은 아르바이트를 자기의 일처럼 느끼고 배우며 이어 갈 수 있었을까? 작은 소용돌이가 둘의 젊은 날에 아프지 않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지나가는 시간들의 경험을 잘 견디면 훗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이런 일들도 좋게 여겨질지 모를 일이다. 배움과 느낌은 조용히 살짝이 지나가면 이루어지지 않음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에서야 웃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의 의미로 남겨 주기로 하자.
근수와 희정이 개업(오픈)하기 직전에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의 일화를 깊이 새겨 두었다.
삶에서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처럼. 근수와 희정은 장사꾼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가치관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잃어야 하는 것과 얻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 먼저가 되는지 혼돈스러운 일이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어 가느냐, 하나를 먼저 잃고 하나를 얻느냐이다. 돈의 값어치처럼 정해진 액수만큼 딱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만, 하나를 얻으면 여럿을 잃을 수도 있고 하나를 잃고 여럿을 얻을 수 있느냐고 하는 그 값어치 말이다. 장사는 벌어들이는 값어치를 빼고도 보이지 않는 것을 얻는 것이라 믿었다. 결론은 이런 것이다. 나의 것을 나누는 만큼 더 큰 의미를 얻는 것. 바로 무한의 가치.
희정의 가치관은 뚜렷했다. 개업을 하면 어떤 것으로든 찾아 주시는 손님들께 마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수는 잠깐 돈을 벌어 들이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희정에게 "커피값을 할인하는 매장도 있던데 우리도 그렇게 할까?"라며 아무 생각이 없듯 말했다. 희정의 생각은 달랐다. "커피값을 할인하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라고 그리고 커피의 상품성과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근수는 그 말에 흔쾌히 동의하며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라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희정에게 묻는다. 고민과 고민을 거듭해 가며 결론을 내렸다. "커피값에는 손대지 말고 5000원 이상 구매하는 손님들께 보틀을 주는 게 어때?"라고 희정이 말한다. 근수도 말했다. 우리의 가치관과 의미를 돈을 버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보이지는 않고 가치를 따질 수는 없지만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해 보자고 말한다.
근수가 준비한 플래카드를 매장 앞에 잘 보이는 곳에 걸고 있다. 내용은 오픈 이벤트 5000원 이상 구매 시 보틀 증정이라는 내용이다.
개업일에 맞춰 미리 걸어 두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개업날짜를 유심히 보는 듯했다. 아쉽게도 넉넉지 않은 자금 때문에 많은 양의 보틀을 제작할 수는 없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꼭 받으러 와야지 라며 소곤소곤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개업과 더불어 보틀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몰렸었다. 대학생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다. 근수와 희정은 한 가지만 생각을 했다. 조금 적게 남기고 우리의 마음을 나누면 손님들도 그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라는 믿음.
누군가 시도하지 않는 것을 해 보는 지금의 일들이 시간이 흘러 나 스스로의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이다. 희정의 가치관과 판단은 시간과 공간이 변해도 남보다 앞서는 실천은 행복한 도전이 될 것이다. 다음에 또 1주년이 되고 2주년이 되어도 근수와 희정은 똑같은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나누려고 계획할 것이다. 장사를 위한 어려운 결단일수록 힘들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삶에 질적으로 풍부해지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기대가 만족으로 이어지는 순간이 기쁨이 되었다.
장사의 가치관을 잃지 않고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있어서이다. 손님의 기대에 맞추지 못하면 실패하는 역사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잘 견디면 웃을 수 있었던 근수의 기억처럼 근수와 희정이 함께하는 시대를 앞서가는 도전도 나의 것을 잘 나누면 더 많은 행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남들이 인정하지 않는 무모함도 진심을 담을수록 우리를 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장사꾼이 이익을 남기는 것을 내려두기는 쉽지 않다. 그런 어느 날 근수와 희정이 서로에게 "지금 행복해라고 물을 때 "정말 행복해!"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순간의 이익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손님들의 마음속으로 빠져들 것이다.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유쾌하고 상쾌한 아침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마음을 담은 인사를 신나게 외치고 있다.
근수와 희정의 미래에서 지금의 근수와 희정이 마중 나와 그들이 서로 위로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잘했고 수고했다는 말을 전할 수 있길 소망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