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청춘이라는 선물을 받아 든 지금이 가장 뜨거워야 할 시기이다. 늘 곁에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벗들이 우리들의 옆을 지켜준다. 늘 가까이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누며 살아가는, 어쩌면 웃을 일들만 이어질 것 같았던 날. 그런데 살아가는 일이 생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청춘이야말로 아파해야 할 시간이었다. 모처럼 찾아온 날의 행복들 마저도 잊게 하는 일들이 많아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의 즐거운 상상이 영원하지는 않지만 소나기처럼 안 좋은 기억도 그칠 것이다. 더욱 뜨거워질 여름날처럼..
잘 웃고 늘 즐거워 보이던 재덕이가 아침부터 풀이 죽은 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근수는 재덕이의 그런 마음을 알리 없다. 재덕이 왠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오늘 같은 모습을 처음 본터라 뭐라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근수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 재덕을 위해 음료를 내밀며 "오늘 많이 피곤하구나"라고 묻는다. 재덕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재덕이 근수를 계속 바라본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라고 재덕에게 말을 건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분명한데 물어볼 수가 없어 포기한다. 재덕이 "갑자기 야~ 너도 똑같은 놈이야. 앞으로 너무 친한척하지 말라고" 하며 난데없이 화를 내며 말을 한다. 영문도 모르는 근수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재덕이를 바라본다. 너무 화가 났는지 목소리까지 떨어가며 계속 근수에게 "친구가 뭐야 어~?" 라며 더 큰 목소리로 묻는다. 근수는 너무 황당해 말을 하지 못한다. 재덕이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린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올 모양이다. 근수는 평소의 재덕이 답지 않은 모습에 많이 놀랐지만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 알고 싶어 재덕이를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모르는 일이 분명 있는 것 같은데....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겨있다.
재덕이 제법 긴 시간 담배와 만나고 왔다. 재덕이 미안한 듯 "네게 한 말이 아닌지 알지?" 라며 말한다. 근수도 좀 전의 말을 생각하며 잔소리라도 하려다 재덕이의 말에 올라오는 감정을 누른다. 근수가 눈치를 보며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봐!"라며 재덕에게 말을 건다. 한참을 망설이던 재덕이 말문을 연다. "너도 알지 내 친구 영철이, 경준이?"라고 묻는다. "아~ 저번에 고등학교 친구라며 커피숍에 왔어잖아?" 대답한다. "그래 맞다"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인다. 한숨을 푹 쉬며 진정을 하려는 듯하다. "그 친구들이랑 이번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말이야"라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근데 왜?"라고 근수가 묻는다. 재덕이 흥분한 채로 "그 놈들이 아르바이트가 일찍 끝났다고 나를 빼고 다른 친구 한 명과 세 명이 여행을 간다고 하드라"며 혼잣말로 욕까지 하며 근수에게 말한다. 근수도 자신의 일처럼 같이 욕을 해 가며 재덕이의 마음을 이해해 주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라며 재덕이를 바라본다. "시간이 안 맞아 내가 못 가는 건 이해하지만 어쩜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고 나한테는 통보만 하냐며" 재덕이 말한다. 근수도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잠시 위로가 되어 줄 뿐이었다. "우리끼리 월급 받으면 첫 월급인데 부모님 내의도 같이 사고 시내에서 밥 같이 먹자"라고 위로한다. 재덕이 근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것이 얼마나 아팠을까? 청춘이라는 이 뜨거운 심장에 찬물을 끼얹는 일들이 잦아들 것이다. 가장 가까운 친구에 대한 배신이 너무 큰 상처가 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이 뜨거운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사람과의 인연도 세차게 내리다가 멈추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비가 그치면 더욱 단단해지면 된다. 뜨거운 이 여름의 소나기를 함께 맞으며 우산 없이도 소나기가 두렵지 않은 인연을 만들면 될 것이다.
근수와 재덕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여름 햇빛을 피할 그늘 속에 잠시 서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근수는 지나온 청춘의 소나기를 다 맞고 피해 가며 두 번째 아니 세 번째쯤 될 듯 한, 아니 두세 번으로 나눠진 청춘이라 하자. 뜨겁지만 뜨거워하면 안 될 중년의 여름날을 지나고 있다. 카페의 넓은 창은 희정과 함께 잘 모아진 볕을 쬐기에 너무 좋다. 사람은 늘 혼자이다. 자신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사람과의 만남이지만 흘러간 시간을 되돌아보면 참 많은 사람과의 인연이 계속되었다. 인생의 연표에 기록되어 줄 사람들 그리고 추억이 남아있다. 비록 모든 것들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희미해진 기록이지만 하나하나 다시 꺼내 되돌려 보는 즐거움도 있다. 즐거움 보다 아픔이 오래 기억되는 건 근수 자신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의 약을 얼마나 많이 먹고 견뎌왔을까? 망각이라고 하는 영양제는 우리 모두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소중한 선물이다. 퇴색되어 가는 기억들을 열심히 머리를 짜내어 떠올리는 것도 이제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어 좋다.
근수와 희정은 아침마다 주문을 외우듯이 말한다.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좋은 하루를 보내자는 외침, 그 소리를 삭제해 버린 둘에게 주어진 카페의 시간 말이다. 희정은 한 달 두 달이 쌓여 갈수록 입버릇처럼 말한다. "자기야! 카페를 하고 나서 난 너무 밝아졌다"는 말. 측은하기도 미안하기도 한 애잔한 그 말. 근수도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상대하면서 나의 밝은 감정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걸 스스로 깨달은 희정의 모습이 사랑스럽다"라고 말해 준다. 부부인지라 왜 다툼이 없겠는가! 소소한 일도 큰 싸움이 될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근수와 희정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도 작건크건간에 싸우고 나면 한 동안 말을 하지 않았었다. 카페를 하면 손님을 상대해야 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손님들 앞에 서야 한다. 싸우고 아무 말 없이 자기 일만을 하다가 손님이 불쑥 눈치 없이 근수와 희정에게 같이 대답해야 할 질문을 한다. 연기라도 하듯 손님들 앞에서 웃으며 답을 해야 한다. 무조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결론 내릴 수 없는 일들일 지라도 손님들 덕분에 싸움의 감정을 잘 풀 수 있었다. 좋게 변화되고 잘 웃어주는 시간이 길어지는 근수와 희정에게 남은 카페의 시간은 좋게 남아 줄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중에서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것이 최선인 것이고 그중 청춘의 어느 날 뜨거운 소나기처럼 지나는 인연이 있을지라도 중년의 부부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일방통행의 소통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지만 사람이 만들어 낸 마주 보고 지나갈 수 있는 일방통행의 소통은 마주 대하는 횟수만큼 잘 통할 수 있으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아침 일찍 희정과 대학생이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픈과 동시에 자주 커피를 마시고 강의를 들으러 등교하는 학생인 듯했다. 근수가 늦게 나오는 날 희정과 제법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친해진 것 같았다. 아마 혼자 원룸을 구해 학교를 다니는 것 같았다. 타지에서 온 학생이다 보니 대화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카페가 편해진 모양이다. 마음을 먼저 열어주는 자식 같은 학생에게 부모 같은 마음으로 전하는 말 한디 그리고 학생이 근수와 희정을 믿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니 단골이 되어 주었다.
한때 인형 뽑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 학생 단골이 인형 뽑는 재주가 뛰어났었다. 우후죽순처럼 인형 뽑기 방이 생기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근수도 희정도 한 번씩 카페를 마치고 가보았다. 은근히 중독성 있는 게임에 근수가 푹 빠졌다. 희정이 "자기야 이제 인형 그만 뽑아! 돈을 주고 인형을 사는 게 낫겠다"라며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 그 말을 듣고도 몰래 인형을 뽑아 들고 웃으며 카페로 들어오면 못 이긴 척 웃어주는 희정이었다. 이에 질세라 그 단골학생이 어느 날 당일 뽑은 인형과 그전부터 뽑아 모은 인형, 무선 조종자동차까지 제법 많은 양을 안고 카페로 온 적이 있다. "뽑기의 신 오셨네"라며 근수가 반긴다. 많이 부러운 듯 눈으로 바라본다. "이 많은 걸 다 뽑았냐"며 희정이 말한다. 그 학생은 "이제 졸업할 때도 다돼가고 원룸 계약기간이 끝나 방을 옮겨야 된다며 이사를 하려면 짐을 줄여야 된다"라고 말한다. 근수가 눈치 없이 "카페 마치고 가 봐야겠다"라고 말한다. 희정이 그 말을 듣고 "중독됐네, 중독됐어!" 라며 잔소릴 한다. 그 학생은 "제가 이 인형과 선물을 카페에 기부하고 싶다"라고 한다. 근수와 희정이 만류했지만 학생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정이라는 걸 나누는 건 잘 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근수는 그 선물 같은 기부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희정에게 "어차피 이 많은 걸 매장에 둘 수는 없으니 그 학생과 의논해서 이벤트를 하는 게 어때?"라고 말한다. 그 학생이 흔쾌히 허락을 해서 일정 금액이상 구매하는 손님에게 응모권을 나눠주고 등수를 정해 나눠 주기로 결정했다. 응모가 끝나고 당첨된 손님들에게 문자로 알려 주었다. 작지만 나누는 행복도 인형 뽑기처럼 제대로 중독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되었다.
마음을 나누는 크기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주는 사람의 마음으로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학생에게는 아침시간 여유롭게 나누는 이야기가 크게 다가온 것일 수도 있다. 근수와 희정역 시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그 학생의 마음 씀이 큰 감동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것인지 알았고 그 마음의 나눔이 최선임을 배워가고 있다.
희정이 사람을 잘 기억하고 손님을 대하는 것이 늘 신기했다. 희정은 100% 확신이 들어도 다시 묻는다. "손님! 아메리카노에 설탕 두 스푼 넣으시는 것 맞으시죠?"라고 묻고 손님의 취향을 기억해 둔다. 손님은 "기억하시네요" 라며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라며 인사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손님이 카페 주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할수록 또 하나의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길이다. 사람과 진심으로 소통하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카페와 근수와 희정의 생각의 성장이 더 좋은 날들이 되어 가고 있다.
지금의 중년은 가슴과 머리가 함께 뜨거운 여름날이다. 많은 사람과 이어질수록 더욱 뜨거운 중년의 계절이 되어 줄 것이다. 소나기처럼 빠르게 스치는 인연도 받아들이는 식지 않는 마음에 담을 것이다.
갑자기 희정이 근수에게 "오늘 인형 뽑기 방에 가면 알아서 해"라는 말이 계속 귓전을 맴돈다....
<소설>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