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의 비용
모두가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조직은,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조직 내 의사결정 방식에서 ‘합의’는 가장 민주적이고 평등한 형태처럼 보인다. 모두가 납득하고, 다수가 동의하고, 서로의 생각을 조율한 다음에 결정을 내리는 방식. 듣기에는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 방식에는 하나의 위험한 전제가 숨어 있다.
합의가 유효하려면, 참여자 모두가 동일한 정보와 맥락, 전문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즉, ‘같은 그림’을 보고 있어야 하고, ‘그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서로 다른 부서, 다른 역할, 다른 수준의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다. 정보 접근 수준도,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 순간, 결정은 합의가 아니라 타협이 되고 만다.
합의는 때로는 회피의 다른 이름이다. 책임을 나누려는 집단은 ‘공동 결정’이라는 장치를 통해 실패의 책임을 분산시킨다. 결정이 아니라 ‘무결한 절차’만을 추구하게 되고, 정작 중요한 방향성은 잃게 된다.
초기 스타트업은 권위보다 동료애가 우선한다. “우리가 함께 만든다”는 태도는 중요한 문화적 기반이 되며, 평등한 구조는 실무의 밀도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회사가 성장하면서 이 문화는 부작용을 낳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전원이 모든 회의에 참여하고, 의사결정도 함께 한다. 하지만 점점 팀이 커지고, 결정해야 할 사안이 복잡해질수록 이 방식은 병목이 된다. “이건 모두가 함께 논의해야 해”라는 말은 곧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없어”라는 뜻이 된다.
합의 중심의 조직은 점점 회의를 늘리고, 발표자료를 늘리고, 설명의 시간을 늘린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은 지연된다. 결정이 지연되면 실행도 지연되고, 실행이 지연되면 학습도 지연된다. 결국 속도는 사라지고, 남는 건 피로뿐이다.
합의 중심 문화는 결국 누구도 리스크를 지지 않으려는 구조로 바뀌게 된다. 누군가 선명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모두가 ‘안전한 답’을 찾는다. 이때 조직은 방향을 잃는다.
비대면·하이브리드 환경은 합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화면 속에서 사람들은 말의 뉘앙스를 파악하기 어렵다. "좋습니다" 와 같은 표현으로 동의하지도 비동의하지도 않은 상태로 시간은 흘러간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기에 ‘빠른 잡담’이나 ‘즉석 피드백’ 같은 것들도 줄어든다.
회의는 길어지고, 참가자는 많아지고, 정작 아무도 결정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좋은 의견입니다”,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른바 ‘비동의 없는 합의’가 성립되는 구조다.
하이브리드 환경에서는 정보를 누가 먼저 접했는지, 누구와 사전에 이야기했는지에 따라 의견의 힘이 결정된다. 회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구조적 불균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짜 문제는, 합의라는 이름으로 불평등한 영향력이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좋은 리더는 모두의 찬성을 받기 위해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는다. 대신, 왜 이 결정이 지금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그 결정이 어떤 근거에 기반했는지를 명확히 한다.
모두를 설득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조직이 결정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이 기준은 때로는 반대 의견을 넘어서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더는 합의가 아니라 방향을 주는 사람이다.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 결정은 대개 안전하지만 무의미하다. 반대가 없는 결정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결정일 수 있다. 리더는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확보한 상태에서 이견을 견디는 방식으로 결정해야 한다.
리더가 방향을 설정하거나 결정하지 않으면 비판받는 것은 리더이며 실패의 책임은 리더에게 돌아간다.
모두를 설득하려고 했던 선의의 의도는 사라지고 적절한 시점에 의사결정하지 않은 무책임한 사람으로만 남게 된다.
합의 중심 조직의 가장 큰 문제는 결정권과 책임이 분리된다는 점이다. 모두가 결정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누구도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 혹은, 책임은 특정인이 지지만 결정은 다수의 합의로 이뤄졌기 때문에 효율적인 실행이 어렵다.
좋은 조직은 결정과 책임이 연결되어 있다. 결정한 사람이 책임지고, 책임지는 사람이 결정한다. 이 원칙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그리고 이 구조는 반드시 제도적으로 명확해야 한다.
“다 같이 정했잖아”는 책임 회피의 전형적인 언어다. “내가 정했으니 내가 책임진다”는 조직의 힘이 된다.
합의 없는 실행은 리더십의 독선으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그것이 작동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정보의 대칭: 결정자가 정보를 독점하지 않고, 구성원이 의사결정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명확한 기준: 왜 이 결정이 내려졌는지, 어떤 우선순위에 기반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피드백 루프: 실행 이후 결과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잘못된 판단은 빠르게 교정할 수 있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있으면, 구성원은 ‘내가 참여하진 않았지만 납득할 수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조직의 실행력을 높이는 핵심이다.
의사결정은 모두를 위한 설득이 아니라, 명확한 선택과 책임의 구조다. 좋은 결정은 동의보다 선명함을 남긴다. “이 결정은 왜 내려졌는가”, “누가 책임지는가”, “언제까지 검토할 수 있는가”가 분명하다면, 반대는 문제되지 않는다.
합의는 모두가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누구도 완전히 괜찮을 수 없고, 어떤 결정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불만을 감수할 수 있는 구조와 신뢰다.
조직은 결정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그리고 결정은 누구나가 아니라,
정해진 사람이, 정해진 기준에 따라,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좋은 조직은 합의가 아니라 정렬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실행력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이 스타트업이 반드시 넘어야 할 합의의 착각이며,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다.
모두가 동의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계하라.
리더십은 동의의 수가 아니라, 결정 이후 흔들리지 않는 구조에서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