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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Dec 31. 2023

타인의 서식지가 되어주고파

학급 대항전을 통해 느낀 반장 부반장의 훌륭함

시험이 끝나고 학급 대항 운동 경기가 한창인 주간을 보냈다. 반장이 대진표를 추첨하고 어느 반과 대결하는지가 정해졌다. 우리 반의 일정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내가 들어가는 수업시간도 확인해서, 어느 날 몇 교시에 해당 학급을 인솔해 강당으로 향해야 하는지 눈여겨보았다.

공부도 제일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에이스 반 반장이, 국어 시간을 앞두고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희 내일이 시합인데 연습을 한 번도 못해가지고요. 국어 시간에 배구 연습 좀 하면 안 될까요?”

조금 실랑이를 하다가 체육 선생님께 장소 이용 허락을 구해오라고 하고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반장을 비롯한 학생들에게 우리는 여기서만 연습하기로 하자고 허용 공간을 정해놓고 그들의 연습을 지켜보았다. 오전이라 꽤 추웠음에도 두툼한 패딩점퍼를 벗어던지고  아이들은 연습에 몰두했다. 여학생들은 에이스 반 답게 일렬로 줄을 서서 패스를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학생들은 좀 더 넓은 공간을 누비며 달리기와 공 던지기를 조합했다.

운동에 소질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지 않은가. 편의상 뛰어난 몸놀림을 보여주는 학생들을 기역이, 보통 실력의 소유자들을 니은이,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학생들을 디귿이라 부르겠다. 기역이들은 경기를, 니은이들은 필요한 연습을, 디귿이들은 벤치에 앉아서 그들을 구경하며 입을 놀렸다. 더러는 공부를 하는 디귿이도 있다.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디귿이들 사이에 서있다가 다시 니은이들을 맹훈련시키는 기역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너무 추워서 운동장 둘레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덕분에 미세먼지가 많았던 오전, 연습하는 학생들을 감독하다가, 말만 감독이고 나를 그저 세워둔 덕분에 목감기를 얻었다. 맹연습을 했던 니은이들 가운데엔 실전이 있던 다음 날 감기몸살로 결석한 아이도 있었다. 그럼 디귿이 한 명이 니은이가 되어 경기에 참여한다.

오후 햇살과 연습하는 아이들

그렇게 경기 날이 되었다. 강당 수용 인원을 고려해 운 좋게 반별 경기를 직관할 때면 활력의 옷을 입은 새로운 자아의 중학생들을 볼 수 있다. 저렇게 공만 쥐어줘도 교실에서의 모습, 표정과는 다른 자아가 나타나다니 나는 매번 두근거린다. 기역이들은 놀라운 점프를 보여주기도 하고, 멀리까지 공을 보내는 파워도 갖추었다. 공이 그에게 갔다 하면, 불꽃슛을 이루어내는 놀라운 기적. 그런가 하면 멀뚱히 서있다가 공이 오면 허둥지둥 팔을 휘둘렀다가 엉뚱한 데로 튀게 하거나, 자신의 서브 차례가 되어 공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네트에 걸리는 니은이들도 있다. 단체경기 인원수를 맞추려면 니은이들의 참여가 필수적인데 (인원이 많은 우리 반은 경기에 뛰지 않는 디귿이들도 여럿 생긴다.) 곳곳에 구멍을 만드는 니은이들을 대하는 기역이들의 태도가 반마다 달랐다. 그리고 이 태도는 공을 손에서 떼었다 붙였다 하며 경기를 장악하는 학생들의 멋짐과는 다른 감동을 주었다.


스포츠 팀을 구성할 때 반장과 부반장이 제외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장 부반장은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인성이며 말투가 호의적이어야 뽑히는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얻은 학급 임원들은 반 대항 경기에서 중추로 활약한다. 운동 실력이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팀의 단합에 크게 관여한다.

실력이 좋아 우승 후보가 유력한 반 여학생 임원이 불만이 가득한 채로 교무실로 왔다.

“선생님, 저희가 연습한다고 운동장 가쟀는데, 남자애들이 너네나 하라면서 안 나와서 선생님한테 혼났어요."

자꾸 자기들에게 뭐라고 한다고 말하면서 울먹거린다. 이번 경기는 남녀 따로 시합을 하고 나중엔 혼성 경기도 치른다. 시합 나가기 싫다며 우는 걸 담임 선생님이 공감해 주시고 합리적인 조언을 건네 달랬다. 상대방을 탓하게 될 때 팀의 단합은 여지없이 흔들린다. 저 반은 성별로 대립했지만 또 어떤 반에서는 ‘너네 때문에 졌잖아’ 하면서 같은 성별의 니은이들을 비난해 싸움으로 번진 일이 있었다. 그렇게 큰소리 내는 이들이 과연 기역이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반장, 부반장의 존재감이 흐릿한 학급이라는 것만 안다.


반면 우리 반은 (그렇다, 우리 반 아이들의 어여쁨을 드러내기 위한 밑밥을 좀 깔았다.) 반장 부반장이 훌륭하다. 연습 경기와 실제 경기를 세 차례 관전할 수 있었는데 우리 두 사람은 팀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여학생 임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뽐내는 기역이로 활약해, 연습에서는 열을 맞춰 니은이들이 원하는 지점으로 공을 던질 수 있도록 지켜봐 주었다. 실전에서 니은이들이 공을 놓치거나 민망해할 때 반달눈으로 웃으며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했다. 니은이들은 어색한 몸짓으로 실수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남학생 임원은 귀여운 카리스마로 경기를 위해 몸을 던졌는데, 니은이든 기역이이든 실점을 할 때마다 눈을 활처럼 만든 채 웃어주었다. 반장과 부반장이 이렇게 다른 아이들에게 유하면 친구들도 그 영향을 받는다. ‘괜찮아’ 외치는 소리에 힘을 얻어 다음의 공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성별이 경기할 때 소리 내어 응원해 주는 아이들의 중심에도 반장, 부반장이 있었다. 나는 경기장 바깥에 멀찌감치 서서 간혹 박수를 쳤고, 한 번씩 사진을 찍었으며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 비록 우리 반이 1등을 하진 못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서 정말이지 뿌듯했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네 번 읽었다.(한 번 읽으면 다시 읽게 되고, 독서모임을 앞두고는 뒤에서부터 들춰보다가 다시 앞에서부터 읽었습니다. 허투루 쓰인 문장이 없이 차곡차곡 끝을 향해 나아가는 짧은 소설이다.) 엄마가 출산을 앞두고 있는 소녀 ‘나’는 먼 친척집에 맡겨지는데 첫날밤 침대에서 실수를 한다. 아침에  킨셀라 아주머니는 젖은 침대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아이를 습한 방에 재웠다며 오히려 자신을 탓한다. 독자로서도 아이가 오줌을 쌌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할 만큼 부드럽게 일을 처리한 것이다. 주인공인 ‘나’는 첫날 아침의 경험을 통해 부모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다정함과 애정을 느낀다.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다산책방

어제 독서모임을 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지혜로운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실수를 한 아이는 양육자의 태도에 의해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지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형성하기도 한다고. 비단 부모가 아니더라도 그 마음은 가까운 사람, 어른이 되어서는 배우자 또한 긍정적인 자아를 만드는데 일조한다고 말이다.

맞장구를 치면서 나는 우리 중학생들을 떠올렸다. 학생들이 경기를 통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구나, 나 이대로도 괜찮다는 마음을 느꼈겠구나, 하며 벅차올랐다. 시합을 하면서 실수든 실력을 발휘하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응원과 격려를 받으면서 받아들여지는 경험, 이 멋진 선물을 훌륭한 반장, 부반장이 선사했구나. 호의적인 분위기를 만든 것도 이 아이들 덕분이라 느끼며 따스함에 일렁였다. 정혜윤 PD님의 책 <천재들의 사생활>에 인용된 김산하 박사님의 말이 생각났다. 동물을 연구하는 그는 ‘서식지’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서식지는 시공간의 물리적 개념에 그치지 않으며 한 사람이 또 다른 이의 서식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나는, 내가 누군가를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게 하는 서식지가 되고 싶어졌다. 우리 아이들에게 <맡겨진 소녀> 속 친부모처럼 나쁜 배경이 아니었으면, 킨셀라 아주머니 아저씨 같이 다정한 배경이 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더불어 우리 반장 부반장처럼 부드럽고 귀엽고 무해하길. 서로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고 회상할 수 있기를.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우리 임원들이 기특하게 여겨졌다.



학년 말에는 스포츠 대항 말고도 다양하게 아이들의 끼를 뽐낸다. 처음 해보는 것은 학급별 릴스 만들기. 15초 동영상으로 우리 반을 표현하라고? 도대체 뭘 한담. 작품 제출일, 봉사활동 시간 얼른 청소를 끝내고 회의를 했다. 역시 우리 반장 부반장은 달랐다. 이런저런 아이디어에 유튜브로 레퍼런스를 보여주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더니 뚝딱 만들어진 감성적인 장면. 촬영은 내가 했는데 엄마 미소를 띠면서 찍었음은 물론이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몫을 해낸 우리 반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따스한 분위기의 합창이라니. 이것만 보면, 학교폭력이라든가 교권침해라든가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아주 무탈한 한 해를 마무리한 느낌이다.

서로를 인정하고 자기 모습대로 키워주는 무해한 서식지를 종업식까지 계속 만들어갈 일이다. 해가 넘어가도 아직은 방학이 아닌 곳에서.

교실 불을 끄고, 핸드폰 플래시를 흔들며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부르던 아이들, 가운데 학생은 기타 연주, 천장까지 빛으로 어른어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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