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며 마주하는 모순 <괴물 부모의 탄생>
아이 둘을 키우면서 첫째한테 미안한 게 많다. 얘도 처음일 테지만 나도 이 학령의 아이를 키우는 일은 처음이어서, 엄마가 너무 모르고 해줘야 할 걸 못해주나 하는 마음 탓이다. 고등학교 교복을 맞추러 가면서 바지를 더 주문했어야 하나 망설였고. 다들 과학과 국어 학원 다니며 진도를 뺀다는데 너무 안일했나 하는 반성. 내 2학기 종업식이 늦다는 핑계로 겨울방학 학원수강을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핑계가 사라져 버린 방학에도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문제집만 사주고 말았다. 극성스럽게 공부를 시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얘가 너무 떨어지면 어쩌지, 잘하면 좋은데 하는 양가적인 마음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
그렇다면 둘째는 큰애를 통해 겪은 시행착오를 새기고 잘했어야 했는데 그랬느냐 하면 글쎄올시다. 큰애에게 해줬던 축구교실도 한번 못 시켰고, 수영도 어영부영 여전히 물을 무서워하는 데에 그쳤으며, 코로나로 (둘 다) 음악교육엔 발을 들이질 못했다.(손을 들이는 게 맞지요.) 다만 선행에 늦은(이게 말이 되나요? 선행학습에 뒤처졌다니요.) 큰애보다 얘는 수학을 더 시켜야겠다며 빡센(!) 학원을 등록해 준 게 일 년 전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름 있는 학원으로, 학교에서 만나는 중학생들 중에서 그 학원에 다니는 애들은 나름대로 학원에 대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우리 아이는 초등학생이니 그냥저냥 적응해서 다녔던 것 같다. 실력이 일취월장했는지는 모르겠다. 학원에 앉아서 수학 문제를 앞두고 씨름하는 시간이 길기는 했을 거다. (숙제를 그리 오래하지도 않더라고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새로 받은 중등과정의 시간표를 보면서, ‘정말 오래 있는다’는 생각만 했다. 예리하지 못한 엄마라 어떤 문제집으로 몇 학년 과정을 어떻게 학습하는지보다 그런 게 더 보였다. 새 학년도 과정 바로 직전, 그러니까 세밑에 학원 차량 시간을 받아 들고 몇 번을 들여다봤다. 네 시 사십 분에 타서 열 시 삼십 분에 온다고? 그럼 밥은 언제 먹어? 지금은 방학이지만 내가 출근하면 네시 반 전에 먹을 것을 챙겨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열 시 반에 저녁을 먹인다고? 우리 남편은 그 시간이면 진작에 침대 위에 눕는다.
남편과 상의해 학원을 옮기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들어간 학원인데 지금 나오면 다시 들어가기 힘들 거란 생각은 했지만 아이를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아이에게 이러저러해서 학원을 옮겨도 되겠느냐 물었다. 우리 집 아이들의 특징일까,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사춘기 도빵이의 문장은 언제나 단답형이다. ‘응’ 그래도 거기 다니면서 좋았댔잖아, 아쉽지 않겠어? ‘응’인지 ‘아니’인지 분간이 안 되는 음성. 해석하기 어려웠지만 어디든 상관없다는 듯해서 동네의 큰애 학원에 레벨테스트를 예약하고 이전 학원에 연락 드렸다. 잘 나가는 학원은 다르다, 예, 어머니, 어디서든 잘해나가길 바랍니다, 산뜻한 인사.
방학을 맞이해 쉬고 집안일하고 문화생활하는 틈틈이 사람들을 만났다. 둘째 학원에 대해 얘기하니 다들 보이는 반응이 왜 그만뒀냐는 거였다. 저녁을 못먹이잖아요. ‘미리 먹을 거 만들어놓으면 되지’ 나는 생각도 못했다! ‘냉동 도시락을 데워먹으라고 해도 되고’ 그런가? 심지어 어제는 ‘밥시간 때문에 거기 그만두게 했다는 얘긴 처음 들어요’하는 얘기까지. 나는 생각 없는 엄마인가. 그래서 다들 학원가 근처로 이사하는구나 새로 알았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후회가 조금씩 생기기도 했다. 방학 때만이라도 그냥 다니게 해볼 걸. 잘하는 아이들 틈에서 의욕이 생길 수도 있고. 나로서도 아이가 내 눈앞에서 게임을 하거나 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보다 학원에 가있는 시간이 더 안심이 되기는 하니까. 그렇지만 아직 열세 살 아이를 깜깜한 밤에 허기져서 집에 오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내가 안되나 보다. 그래도 어떡해. 난 못하겠다. 아이가 또렷한 발음으로 ‘나 그 학원 더 다니고 싶어요‘ 라고 말하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시킬 일은 없을 것 같다.
작년에 우리 반 깡마른 아이가 그 학원엘 주 7일 다닌다는 얘길 들었다. 학교 끝나자마자 가서 열두 시 넘어서 온다는 아이에게 내가 물은 것은 ‘밥은 언제 먹어?’였고,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우는 게 괜찮은지를 물었다. 아이는 힘들긴 하지만 목표를 위해 조금만 참으면 된다면서 단단하게 답했다. 의지가 강하다는 점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는 다르구나 느꼈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시키는 엄마는 다르구나 실감했다. 학부모 상담을 하면서 아이가 마른 데다 급식도 적게 먹는다고 안타까워하자, 어머니도 그렇다고 하셨지만 그 생활태도를 받아들이셨으니까. 공부 시키려면 엄마가 너무 아이를 안쓰러워하면 안 된다더니 대치동 엄마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더 어린아이들도 밤늦게까지 이 학원 저 학원 다니면서 공부하는 현실을 알지만 내게는 멀게 느껴진다. 학원을 다니며 공부하는 즐거움, 실력을 쌓는 기쁨, 원하는 성적을 얻는 성취감은 느끼겠지만 그와 동시에 자유를 박탈당한 느낌이나 주변 친구들을 경쟁자로 여기는 마음, 어쩌면 부모에 대한 화가 생길 수도 있을 거다. <괴물 부모의 탄생>은 사교육 과열하고 상관없지 않다. 책에는 괴물 부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뒷부분에는 아이들 마음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괴물 부모의 사랑을 ‘독이 든’ 사랑이라 칭하며, 분노와 우울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 마음들을 읽고 나는 아이를 그냥 내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 친구 엄마들과 덜 어울리는 이유 중엔 이런 마음도 있다.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 이래서 또 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정보력이 중요한 이 시대에 못 본척하고 있어서. 중등 고등 6년을 대입을 좌우하는 시기라고만 보고 싶지 않다. 틀린 말은 아닌데 좀 더 길게 인생을 두고 말하고 싶은 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때이자 마음도 키우는 시기로,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로. 아니 그러면 지금 열심히 하는 게 맞지. 그래서 이렇게 학원을 느슨하게 바꾸면서도 모순적으로 열심히 공부해야 돼, 아이들에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친정엄마의 도움 없이 육아하고 출근하던 때 일곱 살 네 살이던 아들들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엄마, 왜 자꾸 악당 소리를 내?”
그 천진난만한 물음을 듣자마자 무서운 목소리를 내면서 아이들에게 소리 지른 내가 딱 생각났다. 그전까지는 안 그러다가(알 수 없지만) 친정이라는 기댈 데가 없어지고 내가 아이들을 많이 다그쳤던가 보다. 아이를 키울 때 엄마는 천사 같은 엄마일 수만은 없다. 때로는 악당처럼 아이를 다그쳐야 할 때도 있는 법, 그렇지만 너무 나쁜 악당은 아니고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까지고 좌충우돌할 엄마라서 또 미안타. 그렇지만 너무 팔랑귀로 살지는 않으련다. 내 안의 목소리도 들어가며 아이들의 마음을 돌보며 그들의 성장을 응원하겠다. <괴물 부모의 탄생> 에필로그 부분 한쪽을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