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 아들 곁을 호시탐탐 노리는 엄마
휴일이면 되풀이되는 레퍼토리가 있다.
“어디 갈까?”
늘 이 말은 내가 먼저 하고, 아들들은
“집에 있고 싶은데.”
혹은 침묵.
긴 추석 연휴에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아들이 친구들이랑 축구를 하겠다고 해서, 다른 나들이는 못하고 양가에만 얼른 다녀왔다. 마음 같아서는 연남동도 거닐고 싶고 서촌 나들이도 하고 오고 싶었다. 집에 와서도 별다른 일정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밭수목원이라도 걷자고 몇 번을 얘기해도 싫다는 남자들. 휴일 마지막 날, 이번 달 바쁘다는 남편은 연구실에 다녀오고, 나를 곧잘 따라다니는 큰아들은 수행평가 준비를 하겠단다. 요즘 들어 다 싫다는 둘째는 도리도리만 한다.
명절이라고 양껏 식사를 하고, 늘 술과 함께 하던 저녁을 반성하며 어제는 모처럼 알코올 없는 저녁식사를 했다. 그 김에 달리기를 했다. 남편은 주로 아침에 뛰고, 나는 저녁을 선호한다. 셈해보니 지난달에는 세 번을 달렸다. 2km만 넘게 달려도 나로서는 충분히 운동한 듯 느껴져서 주말에 고만고만하게 달리고 있다. 날이 제법 쌀쌀해져서 긴바지를 챙겨 입고 나갔다. 달리다 보니 익숙한 얼굴이 저만치서 보인다. 우리 학교 부장님, 당신보다 키 큰 아들과 대화하며 걸어오시는 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부장님! “
하고 이어폰을 빼고 멈추었다. 달리기를 하냐고 놀라셔서
”이제 5분 달렸어요! “
했다. 둘째랑 나왔다며 웃음 짓는 부장님께
”아, 저희 집 아들들은 게임하고 있는데. “
했더니 ‘우리 애들도’하는 말씀을 해주셨지만 내 부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더 열심히 달렸다. 우리 아들은 옆에 없지만 나는 달리기를 하고 있지 않느냐고 평소보다 멀리까지 달려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다정한 모자를 다시 마주치고 3km를 채웠다. 평소보다 많이 달렸다고 뿌듯한 얼굴로 걷다가 집 근처에서 또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이번에는 다른 선생님, 역시나 아들과 함께였다.
“아, 공부하다가 나왔구나! 우리 집 아들들은 집에서 게임하는데.”
부러움을 가득 담아 웃는 얼굴을 나누고 집으로 왔다. 엄마 옆에서 환하게 웃는 그 집 첫째 아들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우리 집 남자들에게 바로 투덜댔다.
“다른 선생님들은 다 아들이랑 같이 걷는데, 나만 혼자야.”
<나만 없어 고양이>가 아니라 <나만 없어 아들>인 듯, 나처럼 아들 둘을 둔 선생님들이 아들 하나씩 옆에 끼고 걷는 게 부러웠다고 말이다.
고등학생 아들 하나를 키우는 내 친구 짱아는 지난번 통화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땡땡이한테 같이 걸으러 나가자고 했다가 까였다고 했더니, 그게 당연하다고.
“아줌마, 아들한테 왜 그래?”
하고 나를 타박했다. 그래서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아들이랑 산책을 하지 않는가.
오늘 아침 버찌책방에서 새벽 독서 모임이 있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온전한 내 시간을 만들자는 취지로 새벽 여섯 시 반에 모임을 연 것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나누는 자리였다. 평소와 다른 책을 알게 되고 감상을 듣는 일은 내 세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나는 자문하는 것이다. 이제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심지어는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해도 귀찮아하는 아들들인데 뭐 한다고 아침 일찍 다녀왔을까. 아니, 왜 돌아왔지? 서점에 더 있을 걸. 그 시간의 귀함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우리 집에서 이제 더는 내 나들이 제안이 안 먹히는 걸까 속상해서 하는 말이다. 연휴 첫날에 큰 아이랑 ‘한쪽가게(즐거운커피)’에 다녀온 걸로 만족해야 할까 보다.
전에 ‘엄마에게도 독립운동이 필요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독립하기 위해 분투하는 십 대 아이들을 자꾸 옆에 끼고 있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썼었는데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아들들 둘의 곁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엄마도 자기 시간을 즐겁게 보내야 한다고 다시 기록해 둔다. 이러니 내가 또 계획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번 주 금요일에는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 다녀와야지. 친구와의 수다도, 작가와의 만남도 무척 기대된다. 그런데 저녁 먹고 나는 또 제안하겠지?
“엄마랑 산책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