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 소년의 음 소거 방식
카톡에 안 읽은 메시지가 이백 건이 넘는다. 문자메시지도 빨간 숫자가 늘 있다. 카톡 좀 확인해, 문자 좀 읽어, 하면서 큰아들의 핸드폰을 봤다가
”가! “
하는 1음절의 비명을 들은 뒤로는 억지로 시키지도 못한다. 누가 얘를 괴롭히나? 자꾸 단톡방에 초대해서 못된 말을 건네거나 그런 거 아니야? 학교에서 들었던 학교폭력예방교육이 이럴 땐 쓸데없는 걱정을 만들어 낸다. 그런 일은 없다고 몇 번이나 확인을 받았지만, 쟤가 왜 저럴까 나는 늘 못마땅하다.
카톡으로 오후 일정에 대해 알리고 집안일을 돕도록 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나는 나대로 볼일을 보느라고 아이가 확인을 했나 안 했나 보질 못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무것도 되어있지 않다. 화를 내는 내게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 카톡을 확인 안 한 거다. 그렇지, 이런 거 안 보는 애지. 남편은 몇 달 전 가족 단톡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나마 둘째는 카톡을 보내면 ‘네’하는 대답을 해서 다행이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이 요즈음 진정한 사춘기를 맞이한 듯싶다. 내가 가까이 가면, 온몸으로 짜증을 표현한다. 머리칼 만지지 말라는 시기는 이제 나도 익숙해져서 조심하고 있는데, 그런데 내가 뭘 한다고 이렇게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건지 나는 무척 억울하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저녁이었다. 남편이 큰애를 학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갔다. 학원 버스 기다리고 타고 내리면서 다 젖겠다면서. 그러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으려니 남편에게 전화가 온다. 학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둘째도 데리고 오겠다고 자기는 스마트워치만 가져갔으니 연락해 달라고. 그래서 수업 중인 둘째에게 카톡을 보냈다.
‘도빵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빠가 데리러 갈게. 끝나면 아빠한테 전화해.’
혹시 몰라서 같은 내용으로 문자메시지도 보냈다. 그래도 둘째는 읽으니까 잘 전달되겠지. 학원 끝날 시간에 둘째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와?”
“아니, 엄마 말고 아빠가 갔어. 아빠한테 전화해, 알았지? “
“응”
하고 덜컥 끊는다. 금방 오겠거니 했는데 안 온다. 학원버스 시간이랑 비슷하게 오래 걸리는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도어록 소리가 들리고 발이 푹 젖은 아들이 들어온다.
“아빠랑 왔는데도 이렇게 젖었어? 비가 진짜 많이 오는구나. 얼른 씻어.”
했다. 저녁도 먹이고 편안한 시간(아이가 게임을 하러 방에 들어간 시간)을 보내다가 남편이 말한다.
“아까 하도 전화가 안 와서 내가 전화했어.”
“뭐?”
“도빵이 말이야.”
“응? 내가 아빠한테 전화하라고 했는데? 알겠다고 했는데?”
전화도 안 하고 대로에서 그저 기다리고 있었단다.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뭐야, 내가 하는 얘기는 듣지도 않은 건가? 카톡으로도, 문자로도 전화하라고 썼는데.
그동안의 답답함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니, 얘기를 하면 좀 들어야지. 일부러 카톡으로, 메시지로 두 번 전달했으면 제대로 읽어야지, 왜 이렇게 소통이 안 돼? 아들과의 소통은 원래 이런 건가? 일방통행인데 하나도 저 쪽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흘러간 노래 ‘대답 없는 너’가 생각난다. 전주에 들려오는 전자기타 소리가 비장했지. 요새 들어 이 둘째 놈, 십 대 아들에게 뭔가를 말할 때마다 내 말은 허공에서 사라진다. 아이는 대답이 없고. 말을 걸 때마다 저 비장한 음악이 머릿속에서 연주되는 듯, 내 마음의 풍경이 그렇게나 슬프다.(실제로 노래는 슬픈 가사다.)
비와 관련한 일이 하나 더 있다. 학원 갈 시간, 또 발이 푹 젖어올까 싶어 얼른 전화를 했다.
“도빵아, 비 많이 와. 운동화 말고 크록스 신고 가.”
“응.”
“응? 대답한 거지? 알았어. 끊어.”
이렇게 대답하고 끊으니 옆에 계신 동료선생님께서 웃으신다. 아이의 낮은 목소리는 종종 내 귀에 들리질 않는다.
저녁 일곱 시 삼십 분, 아이가 들어오는데 양말이 푹 젖었다.
“엄마가 크록스 신고 가랬잖아?”
“크록스 신고 갔어.”
하는 거다. 그렇다. 양말을 신고 크록스 신발을 신고 갔으니 그렇게 푹 젖었지. 크록스를 신으라 함은, 당연히 양말 없이 신고 가라는 거였는데, 우리 도빵이에게 그런 융통성을 기대해선 안 되었다. 양말 벗는 발이 하얗게 불었다. 목욕탕에 푹 담근 것처럼. 거의 네 시간 동안 젖은 양말을 신고 있었다니. 아이코야.
아들과의 소통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엄마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은 십 대들의 특징일까. 중학교에만 이십 년을 있었으면 십 대 아이들과의 대화쯤이야 쉬울 줄 알았는데 여전히 어렵다. ‘십 대의 음 소거’라는 주제에 꽂혔는데,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로 엄마 말을 마음속에서 지운다. 아니지, 내 말은 아예 아들 마음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아들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준비해야겠다. 입이 싱글벙글 벌어져있을 땐 대화가 조금 통하려나. 아니지, 대화는 입 말고 귀가 먼저 열려있어야하는데! 귀는 어떻게 여나? 우리 식구들은 대체로 내향형이라 공중을 부유하는 말의 양이 매우 적은 편인데, 그 적은 말마저 의미가 되지 못하고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아까운 마음까지 든다. 그럴수록 말수를 줄이는 게 맞을까. 아닌가, 반복해서 말해야 할까? 방학 동안 종일 부딪치면서 의가 상하지 않을까. 말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데 이렇게 겉돌기만 하고 있다. 내게서 나간 말이 아이를 위한 마음으로 말한 것은 맞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걱정이, 내리는 비만큼 많은 여름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