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를 말하기'가 아닌 '말하기를 쓰기'로 말하기 불안 해결하기
말하기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자신이 없다. 능숙하게 말 잘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갑자기 지명되어 무언가를 발표해야 할 때 수월하게 해내는 사람이고 싶다. 나로서는 일단 할 말이 생각나지 않고, 그냥 떨리니까. 꼭 발표 자리가 아니더라도 내가 먼저 화제를 건네거나 대화를 이끌기가 편하지가 않다. 이런 내가 어떻게 국어 교사를 하고 있나 말하기에 대해 돌아본다.
책 쓰기에 관련해 올해 들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생전 처음으로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책 쓰기 컨설팅을 하고, 중고등학교 선생님들 대상으로 강연을 해보고,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책 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이야 하던 거니까 괜찮았지만 선생님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강연을 하는 일은 괜찮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어른들 앞에 서니 어쩔 수 없는 긴장감, 내용을 전달하면서 '저 지금 떨려요' 하며 분위기를 편하게 하고자 노력했으나 의지와는 다르게 물 마시는 내 손은 떨렸다. 새내기 교사도 아니고 나는 어쩌자고 아직까지 이렇게 떨리는 것일까. 좌중에게 주목받는 입장을 못 견디는 것일까.
동그랗게 모여 앉아 나누는 대화도 편하지는 않다. 지난 주말 우리 동네 버찌책방에서 지식 큐레이터 전병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여름밤의 책'이라는 책 수다가 열렸다. 북토크도 아니고 책 수다라니 말하기에 자신 없는 나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전부터 버찌 님이 전병근 선생님과 독서모임 하고 있는데 정말 좋다며 여러 차례 추천한 터였고, 이번에도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니 편한 마음으로 오라고 친히 연락을 주어서 참석했다. 그렇지만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번역하시고 <읽지 못하는 사람의 미래> 등의 책을 쓰신 선생님과의 대화라니.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할 때, 내향인이며 이런 자리가 떨린다 말씀드렸다. 곧이어 중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말하니 다들 웃음, 나도 웃고 말았다.
(말하기 불안은 중학교 3학년 국어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교과서에 따르면 말하기 불안의 원인은
-공식적인 상황에서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때
-준비가 부족할 때
-상대방이나 말하기 과제에 부담을 느낄 때 등
말하기 불안의 대처 방법은
-철저히 준비하고 연습하기
-말하기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기
-성공적인 말하기 장면 상상하기
-심호흡 또는 몸의 긴장을 푸는 체조나 스트레칭하기 등
이 있다.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 내향적인 성격 탓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불신일까? 모르는 이들에게 주목받는 시선, 내 말이 어떻게 들릴까 검열하는 자아, 말실수하고 싶지 않은 마음 등이 작용하는 것 같다.)
'한여름밤의 책수다'에서 나눈 이야기를 좀 더 꺼내보자면, 책에 대한 전병근 선생님의 과거 경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나긋나긋 찬찬히 이어졌다. 책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경험과 달리 시간을 지연시키고, 우회하게 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말씀 중간중간에 참석한 분들의 독서 경험담이 이어졌고 나는 잠자코 들으면서 속으로 대답했고 생각을 떠올렸다. 다들 대단하시다, 어떻게 할 얘기를 이렇게 바로바로 말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떠올라도 기회를 포착해 말하기란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내가 입을 연 건, 말씀 안 하신 분들도 얘기해 달라는 말 끝이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지체'라는 단어가 내 말하기 고민을 들여다보는 키워드가 되었다.
선생님은 책이야말로 우리를 우회하게 하는 도구라며 생각을 개입하게 하고 인생을 음미하게 한다는 요지로 말씀하셨다. 그렇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뭔가가 즉시 느껴지는 경험과 다르지. 시간을 들여 읽어내는 것. 책을 읽는 건 시간을 내어주며 경험하는 일이로구나,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내가 뭔가를 바로바로 표현하는 말하기에 서툰 것도 이와 관련 있을까?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편한 이유가 그건가 싶었다. 쓰기는 말하기보다 더 시간이 걸리는 일이며 나는 그 쓰기에 관심이 많다. 잘 쓰고 싶고, 시간을 들여 표현하고 싶다. 말하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것을 담아 말하고 싶다.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듯 말하는 것 말고 나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귀한 내용을 선별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하기에 있어 미적거리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이제와 든다. 하지만 강연 내용을 미리 준비해 말하더라도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말하기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만나는 아이들 가운데 나와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이 더 잘 파악이 된다. 기다려주게 되고, 쓰게 하거나 혹은 일부러 넘어가기도 하면서 배려하고자 한다. 말하기에 있어 서투를 순 있지만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며,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표현하면 된다고. 이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야겠단 다짐도 한다. 이게 내가 애써 찾은, 말하기에 자신 없는 교사의 장점이다.
그런데 이런 내게 잊을 수 없는 편지가 있다. 올해 스승의 날에 억지로(그러니까 수업 시간에 쓰라고 시켜서 받았다는 거다) 편지 쓰기를 시켰는데 내게 썼다며 건네준 자잘한 글씨의 편지였다. 워낙 꼼꼼한 모범생이기에 그가 써준 글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는데 주로 수업에 대한 이야기였다. '원래 국어를 안 좋아했는데'로 시작하는 고백. 그런데 읽다가 믿을 수 없어서 다시 읽고 또 읽었던 부분이 있다. 내가 말을 잘한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단어는 생각나지 않지만 요는 빠르지 않게, 전달할 내용을 정확하게 말한다는 거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있다는 문장들을 읽고 놀랐다. 말하기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좋다는 얘기와는 달랐다.)
덕분에 내 말하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그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달변가였다면 받을 수 없는 피드백이었다. 무슨 의도로,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찬찬히 말하는 것. 다시 생각해 보면 듣는 사람을 고려하는 말하기라는 점이 내 말하기의 방식으로 느껴졌다. 아이 덕분에 내 말하기의 장점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맞다, 나는 누구와 함께 있는지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중요한 사람이다. 타로카드 소울넘버도 6번, 'The Lovers'가 아니던가.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러느라 에너지를 빼앗기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 배려할 수도 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말하기에도 반영되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기가 세지 않고, 분위기가 중요하며, 상대에게 맞추고자 하는 마음이 큰 사람. 내 말하기에도 드러나는구나.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많다. 나는 듣는 사람으로 잘 듣고 내 말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지. 말하기에는 듣기가 중요하지 않던가. 훌륭한 청자라고는 자처할 수 있다.
말하기에 서툰 나는 말하기를 글로, 편지로, 책으로 배운다. 김하나 작가님의 명저 <말하기를 말하기> 첫 번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늘 두려웠다. 목소리를 내기가, 낯선 사람을 대하기가, 나의 이야기를 꺼내기가."
팟캐스터로 활동하고 북토크 진행을 유려하게 해내는 그가 지독하게 내성적인 아이였다는 그 고백이 오늘 또 나를 찡하게 한다. 모르지, 언젠가는 거침없는 언변을 갖추게 될지도. 말하기에 대한 이해의 너른 스펙트럼을 장착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