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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Jul 14. 2020

네 인생의 마일스톤을 얘기해 봐

세 가지 울림을 준 만남

뮌헨에서 베를린까지 히치하이킹

햇살이 뜨겁던 8월, 독일 뮌헨에서 베를린까지 무려 600km를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한 날이 있었다. 그때까지 시도한 히치하이킹 중 최장거리 이동이었다. 과연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 전날부터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 미리 히치하이커들의 커뮤니티에 들러 다른 히치하이커들의 노하우가 담긴 정보를 찾는 등 준비를 했다.


아침식사를 든든히 먹은 후 일찌감치 길을 나설 채비를 차렸다. 날이 밝자마자 미리 숙지한 대로 지하철을 타고 뮌헨의 외곽으로 나갔다. 드디어 오늘 히치하이킹을 할 포인트를 발견했다. 앞으로 난 도로는 아우토반으로 곧장 이어지고 있었다.

히치하이킹을 시도한 지 5분이나 지났을까, 한 운전자가 차를 세웠다. 외관상 아주 튼튼해 보이는 검은색 지프차였다. 그렇게 드물다는 여성 솔로 운전자로 영어에 강한 독일식 억양이 묻어닜다. 그녀는 다음 휴게소가 나오자 곧 나를 내려주었다. 비록 짧은 거리에 불과했지만 일단 시작이 순조로웠다. 

뮌헨-베를린, 어쩌자고 이 먼 길을 한 번에 가려고 마음먹었을까?


독일이 궁금합니다

나를 태워준 두 번째 운전자는 메르세데스 벤츠 회사에 근무한다는 50대 아저씨, 구스타프였다. 아저씨 역시 젊은 시절 수시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며 돌아다니던 히치하이커였다.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에선 너그러운 성품이 묻어 나왔고, 영어도 유창한 데다 지적인 풍모까지 풍겨 나왔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간 독일을 여행하며 궁금해 하던 것들을 질문하고 싶었다. 아저씨는 특유의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대답했다. 

나는 독일의 지역감정은 실제로 어떠하고 일본과 대비되는 독일의 역사교육의 특징은 무엇인지 나름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구스타프 아저씨는 민감한 주제에도 진솔한 태도로 답변을 해 주었다. 나는 더 나아갔다.

"좀 민감한 질문이긴 한데 아저씨니까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독일인 사이에선 히틀러로 농담을 하거나 히틀러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모욕이자 실례라던데 정말 그런가요?" 

실제로 아저씨는 히틀러 얘기가 나오자마자 귀까지 벌게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장 대답을 했다.

"만약 내 부인에게 히틀러와 관련된 농담을 던졌다면 당장 따귀를 얻어맞았을 거야." 


아저씨와 130여 킬로미터를 달려왔는데 그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대화가 재미있었다. 아저씨 역시 더 태워주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다. 왕년의 히치하이커답게 아저씨는 얼핏 봐도 주차장의 60% 이상이 들어찬 휴게소의 출구 지점에다 나를 똭 하고 내려주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차를 잡아 탈 것 같은 최적의 히치하이킹 포인트였다. 본 투 비 히치하이커들을 운전자로 만나면 다음 여정이 참으로 순조로웠다.  

나의 끊임없는 질문에 조곤조곤 차근차근 대답해  주시던 구스타프 아저씨



황금색 롤스로이스가 굴러온다

구스타프 아저씨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니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왔다. 점심 먹기엔 좀 이른 감이 있었지만 언제 어디에 떨구어질지 모르는 신세인지라 지금 점심을 먹어두는 편이 나을 듯했다. 일단 나무 그늘을 찾은 뒤 그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베를린이라고 쓰인 사인카드를 옆구리에 끼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스파게티 도시락을 꺼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그때 전방 50미터 지점에서부터 황금색 롤스로이스가 우아한 자태로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왠지 느낌이 싸했다. '안 돼 서지마 서지마. 스파게티, 스파게티 먹어야 돼. 지나가 지나가.' 나는 진심으로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서 히치하이커들의 버스정류장인 독일에서나 가능한 배부른 속 말을 외쳐댔다. 간절한 바람을 보란 듯이 저버리고 롤스로이스는 내 앞에 떡하니 멈추어 섰다. 야구 모자를 쓴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운전자 아저씨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난 함부르크 가는데, 아 베를린 가는구나? 같은 방향인데 타고 갈래요?"

몹시 유창한 영어 발음이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운전자는 야구캡을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뭔가 중후하면서도 젊게 살 줄 아는 사람 같았다. 

함부르크라면 베를린 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계속 같이 죽 가면 될 것 같았다. 못해도 2~300km는 얻어 탈 수 있겠다 싶었다. 잽싸게 도시락 통을 도로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아저씨는 차를 무척이나 아끼는 듯했다. 엔진에 무리가 갈까 봐 에어컨을 켜는 대신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아우토반에서 시속 80km로 달리는 중이었다. 주변의 차량 흐름과 일절 상관없는 속도였다. 

뜨거운 햇살 아래 먼지를 뒤집어쓰며 히치하이킹을 하노라면 거의 늘 피곤해서 차만 타면 그렇게 졸음이 쏟아졌다. 게다가 어제 긴장감 때문에 잠을 설쳐서인지 노곤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운전자 옆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예의도 예의거니와 안전상 문제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럴 때는 졸음을 쫓을 겸, 운전자와 친밀감을 쌓을 겸 대화를 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게 쉽지가 않았다. 창문으로 밀어닥치는 바람소리를 이기려면 소리를 냅다 질러대야 했다. 목이 아프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저씨가 엔진을 위하는 방법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엔진 열을 식히기 위해 매 40분마다 차를 세웠다. 

"엔진이 과열되면 안 되거든. 잠깐 멈췄다 가도 될까?" 

이미 뻔히 답이 정해진 물음을 아저씨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물어왔다. 애초에 황금색 롤스로이스 대신 토마토 스파게티를 고집했어야 했다며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휴게소가 보이는 족족 정차를 하던 아저씨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예 국도로 가는 게 낫겠다는 결정을 했다. 그래야 필요할 때마다 차를 세워 엔진 열을 식힐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한 번 아우토반에서 벗어나면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목적지까지 3~400km 남아 있는데 이동속도가 너무 느렸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데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이제 와서 베를린 가는 차를 국도에서 잡아탈 자신이 없었다. 롤스로이스와 쭉 가는 게 최선의 선택지였다. 한편으론 내가 언제 이런 프레스티지 카를 타보겠나 싶은 마음도 슬쩍 들었다.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나는 또 어딘가 낯 모를 휴게소 그늘에 앉아 이제나 저제나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림 하나. 필요한 거니 아님 원하는 거니?

황금색 롤스로이스의 차 내부는 널찍했고 단순했다. 클래식 카에 어울리지 않는 GPS도 블랙박스도 내비게이션도 당연히 없었다. 대신 아저씨는 종이 지도책을 이용했다. 방향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게 지도책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나는 구스타프 아저씨가 무척 그리워졌다.


롤스로이스는 차가 무거워 주유도 자주 해야 했다. '진짜 우리 언제 가요?'란 말이 턱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주유소에 들를 때마다 주변에서는 차를 보고 숙덕숙덕 댔고 괜히 내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엄지를 치켜 보이는 이도 있었고, 보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나는 되도록 차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곤 했다. 롤스로이스에게는 미안했지만 부끄러웠다. 아저씨는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자신의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한번은 친구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단다. 

"자네 도대체 이런 차가 왜 필요해? 참 이건 너무 과하지 않아?" 

그러자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차가 나한테 왜 필요하겠어? 필요하지 않아. 다만 나는 이 차를 원하는 것뿐이야."


나 같은 실용주의자는 모든 기준이 효용과 효율에 근거한다. 선물로 액자, 열쇠고리, 꽃, 향초 등을 받는 건 질색이다. 나의 성향을 잘 아는 친구들은 생일 선물로 치약, 샴푸, 세제, 컵라면 등을 종합 선물 세트로 만들어 주곤 했다. 선물가게 대신 슈퍼마켓에 들르면 쉽다. 나에게 필요한 건 곧 원하는 것들이고, 원하는 건 곧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필요한 걸 원하는 게 아니라, 단지 원하기 때문에 가지고 싶다니? 필요와 쓸모와 용도 따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기준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말인가?  

나는 그동안 온통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느라 머리를 너무 많이 써 왔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그저 그 자체로 좋은 것들이 일을 것이다. 그러자면 가슴이 움직여야 한다. 과연 나는 머리를 내려두고 가슴이 하는 말에 오롯이 귀 기울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수 있으려나? 

나는 첫 번째 화두를 부여잡고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롤스로이스



울림 둘. 네 인생의 마일스톤을 얘기해 봐

    마일스톤: 돌에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와 방향을 새겨놓은 표지석  
                 역사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이나 획기적인 사건을 일컫는 말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독일어에 서툴렀고 영어가 매우 능숙했다. 나는 운전자의 신상에 대해 질문을 시작했다. 아저씨의 이름은 마이크, 역시나 독일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일 년 전에 부인과 중학생인 아들과 함께 독일로 이주해 왔다. 원래는 미국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쳤는데 함부르크 대학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교수로 초빙한 터였다. 

마이크는 독일에서의 삶의 질이 미국보다 월등히 높다며 독일 생활에 만족했다. 일단 식료품 물가가 쌌는데 미국에선 평균 150달러를 지출할 것들이 독일에선 80유로 밖에 들지 않는단다. 무엇보다 독일의 교육이나 의료 등 복지 수준이 높아 놀라운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여기에 온갖 불평불만을 갖는 독일인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유럽에 사는 가장 큰 장점은 조금만 운전해 가도 문화와 음식과 언어까지 바뀌는 체험이란다. 지난 휴가 때 영국의 아주 오래된 성에 묵었었는데 사춘기인 아들도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선 '전통'을 느낄 수 있어 특별하다고 했다. 다음 주말엔 프랑스로 미식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마이크는 곧이어 자신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종류의 프로젝트냐는 나의 쓸데없는 질문이 빌미를 제공했다. 마이크가 섞어 쓰는 전문용어는 어려웠고 그마저 바람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덥기도 하고 나는 고개만 주억거리며 듣는 척을 했다. 긴긴 이야기를 끝낸 마이크가 문득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여기 있지?" 

나는 간략하게나마 나의 유라시아 여정에 대해 설명했다. 되도록 현지인을 만나고 싶고 모험을 하고 싶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마이크는 심리학자다운 질문을 던져왔다. 

"이런 여행을 하게 만든 어떤 계기가 된 경험(frontier experience)이 있었어? 너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경험 말이야."

지금의 나를 만든 경험이라니, 바로 이십 대 초반 처음으로 떠난 중국 배낭여행이 떠올랐다. 


2001년, 고등학교 단짝 친구와 한달간 중국 실크로드 여행을 떠났었다. 내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을 위해 몇 달간 중국어를 배웠고, 여행책자와 인터넷을 뒤지며 여행 일정을 짜고 유용한 정보도 모았다. 당시 국내 판매 1위라는 유명 가이드북에 쓰인 여러 여행 팁 중 두 가지가 눈길을 끌었다. 

'절대 지갑을 가져가지 말 것' 그리고 '한국말로 이야기하지 말 것.' 

중국인들은 지갑을 안 쓰기 때문에 지갑을 쓰면 외국인임이 드러나 쉽게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던 지갑에 그렇게 무시무시한 의미가 담겨 있는지 미처 몰랐었다. 또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것 역시 외국인이라고 광고하는 꼴이니 소매치기를 당할지도 몰랐다. 

나는 큰돈은 전대에 보관하고 당장 쓸 돈은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옷은 곧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로 상하의 각각 2벌씩만 챙겼다. 왠지 최대한 허름해 보여야 할 것 같았다. 청도로 가는 배 안에서 친구와 나는 앞으로 필요한 얘기는 귓속말로만 하자고 다짐했다. 절대 우리가 한국인임이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실제로 발을 딛고 경험한 중국은 그렇게 무서운 나라가 아니었다. 소림사 근처에서 함께 택시 합승을 했던 아주머니 한 명은 멋들어진 빨간색 장지갑을 열어 꼬질꼬질한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다. 굳이 귓속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한국인임은 어차피 세상이 다 알았다. 기차를 타면 우리 좌석을 중심으로 사람 구름이 겹겹이 생겼다. 중국인들은 우리에게 한국에 대해 질문을 했고, 우리가 연예인이라도 되는 양 사인을 요청했으며,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우리가 잘 먹으면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물론 애초의 의도는 적중해서 어딜 가나 우리의 행색이 제일 허름하고 누추해 보였다. 게다가 지갑이 없어서 지폐가 대부분인 중국 돈을 관리 하기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서안 거리를 걷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잘 못 들었나 싶어 계속 길을 걸었다.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더니 할아버지 두 명이 가판대 옆에서 부채질을 하며 앉아 있었다. 

"샤오지에, 돈 떨어졌어" 

할아버지가 가리킨 손가락 끝을 따라 바닥을 보니 지폐 몇 장이 뒹굴고 있었다. 내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면서 지폐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순간 쿵하는 충격을 받았다. 편견대로라면 할아버지들은 몰래 돈을 주워 갔어야 했다. 그런데 천진한 얼굴로 몇 번씩이나 불러가며 순순히 돈이 떨어졌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실제로 한 달간 내가 경험한 중국은 들었던 바와 달라도 많이 달랐다. 중국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횡단하며 한 달간 치열한 실크로드 여행을 마쳤더니 어디에 가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젠 나 혼자서도 여행을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의 눈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세상과 부딪치며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랐다.


 "그래서 네가 지금 이러고 여행하는구나. 넌 세상이 궁금하지?"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경험이 있단다. 그 경험은 너무나 강력해서 이후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그때는 몰랐어도 현재 자신의 삶을 천천히 돌아보다 보면 그게 무엇이었는지 깨닫게도 된다.

갑자기 나에게 의문이 떠올랐다. 첫 중국 여행은 나 혼자가 아니라 친구와 공유한 경험이었다.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함께 하며 친자매처럼 지냈다. 우리는 중국을 여행하는 30일 내내 붙어 다녔고 함께 의논하고 함께 결정했다. 만난 사람도 겪은 사건도 동일했다. 그런데 10 년이 훨씬 지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친구는 그 이후 두어 차례 짧게 외국여행을 했을 뿐 학업에 충실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졌다. 이십 대 후반에 일찌감치 결혼해 아들도 낳았다. 식물로 치자면 제대로 뿌린 내린 삶을 사는 중이었다.

반면 나는 대학시절은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내내 틈만나면 외국으로 오지로 돌아다녔다. 중국여행은 나에게 마일스톤이 되었지만 친구에게는 하나의 추억 그 이상이 되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그건 사람마다 포텐셜이 다르기 때문이야. 같은 경험을 했더라도 그걸 해석하고 수용하는 방식이 다른 거지. 너는 세상이 궁금하지? 너의 호기심을 놓지 마. 너는 네 가슴이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쫓아갈 용기를 가진 사람이야. 네 포텐셜을 채워갈 수 있어."


지금껏 길바닥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회의감에 젖은 날이 많았다. 의미도 없이 돌아만 다니는 것 같아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이가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 같아 콧등이 시큰거렸다. 

나는 아저씨가 준 울림을 되새겼다. 지금은 나의 포텐셜을 채워갈 시간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끝나 보면 알겠지. 일단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계속 나아가 보자고 결심했다.



울림 셋. 호의라 해서 결과까진 좋을 순 없는 법

처음 아저씨는 약간 쌀쌀맞고 도도하게 나를 대했다. 내가 요청도 하기 전에 차를 태워준 건 분명했지만 별로 나를 대화 상대로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나는 아저씨를 상대로 끝없는 질문을 이어갔고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쳤으며 나의 의견을 거침없이 밝혔다. 말문을 튼 마이크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쉴 새 없이 얘기했고 대화를 무척 즐기는 듯 했다. 

베를린이 가까워졌고 이만 작별해야할 시간이 다가왔다. 어김없이 또 들른 주유소에서 아저씨는 종이 지도책을 꺼내 들더니 책자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자신의 진로를 수정했다. 아저씨는 조금 도는 길을 택해서라도 나를 베를린 근처에 내려주고 싶어 했다. 아저씨는 정말로 나를 위해주고 있었다. 


롤스로이스를 얻어 탄지 장장 5시간 만에 드디어 베를린 외곽에 위치한 조그만 휴게소에 다다랐다. 아저씨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앞의 여정에 행운을 빌어주었다. 황금색 롤스로이스는 함부르크로 방향을 잡아 서서히 멀어져 갔다. 나에게 용기를 주고 깊은 울림까지 준 아저씨를 향해 나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히치하이킹 여행 중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독일에서 만난 미국인 교수 마이크 아저씨

휴게소에서 베를린까지는 약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히치하이킹으로는 한 시간도 안 걸릴 거리였다. 오늘의 여정은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지기 전 순조롭게 히치하이킹을 마칠 수 있겠다 싶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휴게소 출구 근처에서 서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그나저나 마이크는 차 엔진에 무리가 가는 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먼 길을 돌아와 나를 내려 주고 떠났다. 오늘 하루 아저씨가 내게 준 영감과 배려를 되새길수록 감사하는 마음도 커졌다. 그런데 마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뭔가 잘 못 되었다는 걸 느꼈다. 


일단 휴게소 주차장에 차가 거의 없었다. 하루 주행거리를 다 채우고 정차 중인 대형 화물차를 제외하고 승용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길 가에서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 트럭 운전사 한 명을 붙잡고서 베를린으로 가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전혀 예상 못한 당혹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가 베를린과 가깝긴 하지만 주로 동쪽인 폴란드로 나가는 길목이지 베를린으로 들어가는 방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차된 차량들의 번호판엔 폴란드를 뜻하는 이니셜이 박혀 있었다. 

역시나 1시간, 2시간이 지나도록 베를린으로 가는 차는 한 대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간혹 몇 명의 히치하이커들을 마주쳤는데 모두 폴란드로 가는 길이었고, 내린 지 10분도 안돼서 버스 잡아 타듯 차를 잡아타고 사라졌다. 

나는 당혹감과 좌절감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어느새 주차장엔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생각했다. 차라리 아저씨가 원래 내려주기로 한 곳에 나를 내려줬다면, 그랬다면 차를 잡기 훨씬 수월했을지도 몰랐다고 말이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해가며 타인에게 호의를 베푼다. 그럴 때 상대를 위해 최선을 다 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오지만 그런 기분과는 상관없이 어떨 땐 나의 호의가 상대를 더 어렵고 복잡한 처지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결과까지 좋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이제는 사방이 완전히 칠흑처럼 어두웠다. 이 길을 통해 베를린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도 덩달아 까맣게 사라렸다. 그나저나 마이크 아저씨는 함부르크로 무사히 가고 있을까? 괜히 나를 내려준 뒤 도로를 헤맨다거나 그렇게 아끼는 롤스로이스 엔진에 무리가 갔다거나 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나는 텅 빈 주차장 한편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아저씨와의 만남이 준 세 가지 울림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애써 베푼 호의가 퇴색되거나 혹은 원망으로 변질되기 전에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어떻게 여기를 벗어나 안전하게 베를린으로 갈 수 있을까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갇혀 갈 곳 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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