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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Sep 28. 2017

언제 어디서든 위안이 되는 말, '여행자를 위한 기도'

"주문을 외워 봐 넌 행복해지고"

파에톤 콤플렉스(Phaethon complex)

그리스 신화에는 파에톤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파에톤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소년은 친구로부터 놀림을 받게 된다. 파에톤의 어머니는 그제야 아들에게 진실을 털어놓는다. 실은 그의 아버지가 태양의 신 헬리오스(아폴론)라는 것을 말이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버지를 찾아 나서라고 독려한다.

"네가 헬리오스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줄 테니 아버지를 만나 확인받거라"

헬리오스는 장성한 아들을 알아보고 무엇이든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파에톤은 자신을 무시한 이들에게 헬리오스의 아들임을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태양 신의 상징인 태양 마차를 몰고 싶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이 무모한 줄 알면서도 결국엔 허락한다.
파에톤은 태양 마차를 조종하는 데 서툴렀다. 마차는 땅으로 너무 내려가는 바람에 땅을 불바다로 만들고, 사람들의 피부와 머리를 까맣게 태웠다. 그야말로 세상은 혼돈에 휩싸였다. 이를 보다 못한 제우스가 번개를 집어던졌다. 파에톤은 마차와 함께 산산조각 나며 불덩이가 되어 지상으로 추락하였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비극을 낳은 셈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두고 파에톤 콤플렉스라고 한다. 인정 욕구가 심해지면 자기파괴로도 이어진다.



이 구역의 바보는 나야

평범한 나는 대한민국의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역시나 한국에서 초중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 따박따박 월급 받는 생활을 이어갔다. 어딜 가든 비슷한 사람들 틈에서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듣고 이해했다. 익숙한 환경, 사람들 틈에서 별달리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어 졌다. 직장을 그만두고 지인들에게 기약 없는 이별을 하며 익숙했던 나의 공간 소위 컴포트 (comfort zone) 떠났다.  년간의 떠돌이 생활의 시작이었다.

 번째 목적지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이슬람 국가 우즈베키스탄이었다. 언어도 문화도 기후도 음식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틈에서 2년을 살았다. 그리고 다시 짐을 꾸려 유라시아 대륙을 본격적으로 떠돌시작했다.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마다 나와 '다른 '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장소에서 나는 언제나 이방인이었고 언어도 규범도 시스템도  몰랐다. 거의 모든 것에 서툴렀다. 실수는 필연이었지만 실수를 저지를 때마나 매번 자책을 했다.

한 번은 체코 프라하에 도착해 전차를 탔을 때였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기에 미리부터 하차문 앞에 서 있었는데 글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 몹시 당황했다. 전차는 잠시 정차 후 곧장 다음 정거장을 향해 출발했다.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서야 비로소 ‘문열림'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였다. 정류장에 정차해 있는 버스를 타고 싶은데 뒷문이 닫혀 있었다.  옆에 당길  있는 단추가 있었다. 이걸 당겨야 문이 열리나 싶어 단추를  잡아당겼다. 뒷문이 열리는 대신 버스 운전자가 번개처럼 뛰어나오더니 다짜고짜 나를 향해 독일어로 엄청 화를 냈다. 짐작하기로 “네가 이걸 고장 냈는데 어쩔 참이야? “ 이런 내용인 듯했다. 운전자의 입에서 “폴리 짜이(경찰) 어쩌고 저쩌고라는 말이 나오자 내가 이거 단단히 잘못을 저질렀구나 싶었다. 영문도 모른  아침부터 욕이란 욕을 엄청나게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렸다.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운전자의 화가 조금 누그러진 틈을  재빨리 아무 버스나 잡아 타고 자리를 벗어났다.

낯선 곳에서 나는 버스나 전차  하나 제대로 열지 못하는 바보였다. 지하철  하나 끊을래도 남들의  배에서 많으면   이상 시간이 필요하니  뒤로는  길다란 줄이 생겼다. 때론 비행기 탑승 규정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아 티켓값의 두서너배를 물기도 했고, 캄보디아 국경을 넘을 땐 사기꾼에게 웃돈을 뜯기기도 했다.

뒤늦게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금만 부지런을 떨어도 충분히 피할  있는 일이었고 조금 이상하다 싶을  과감히 따져야  일들이었다. 그러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해서 짜증이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당했다는 분함도 잠깐이고 내가 제대로   아는  하나도 없는  아 주눅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나가듯 짧은 잠언 하나를 보게 되었다. 정확한 문구를 다시 찾을  없었지만  내용이 어렴풋이 머릿속을 맴돌며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다시 바보 같은 실수나 해대는 스스로가 초라하고 한심해서 견딜  없던 날이 있었다. 나는 그런 나를 위로하고자 나만의 기도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음에 평온을 되찾아 주는 기도, 소위 여행자를 위한 기도였다.



마음의 평안을 지키는 힘 '여행자를 위한 기도'

여행자를 위한 기도

사랑받지 않고
존중받지 않고
잘 하지 말자

이 짧은 세 구절을 중얼거리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의 초라함도 한심함도 용납하기가 쉬워진다. 나는 기도대로 잘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스 신화의 파에톤 이야기를 굳이 빌려오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나 역시 알량할지라도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대단하다는 한 마디를 들으면 어깨가 으쓱 올라갈 것 같았다. 허나 나를 아는 이도 관심 가진 이도 없는 곳에서 대체 무슨 수로 인정받겠는가? 타인에게 사랑과 존중을 갈구할수록 혹은 잘하고 싶은 욕심을 낼수록 나는 타인의 말과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때론 쉽게 상처받았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환경에 사는 데 서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초심자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기대는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했다.

여행자를 위한 기도를 되뇌일 때마다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무례하게 대해도 그다지 상처가 되지 않았다. 뭐 어쨌거나 기도대로 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끝이 아니야 '여행자를 위한 기도 2'

외국에서 유학 중인 친구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저보다 한참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친구에게도 여행자의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며 나는 얼른 기도문을 공유해 주었다. '분명 이 친구 감명받겠지?' 내가 생각해도 이 기도문은 간결하면서도 뭐랄까 좀 멋이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친구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 기도처럼 되면 어떡해? 계속 사랑도 못 받고 존경도 못 받고 잘 하지도 못하면 그냥 루저 아냐?"

정곡을 찔렸다. 호오포노포노니, 시크릿이니, 시각화니, 뭐니 뭐니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떠들지 않는가? 그럼 안 되지. 나는 재빨리 여행자의 기도에 살을 붙였다.

"걱정 마, 당근 이게 다가 아니야. 여행자를 위한 기도 2가 있어, 이게 진짜지"

여행자를 위한 기도 2

대신 사랑하고
존중하며
정성으로 하자

이제 정말 기도대로 이루어져도 상관없었다. 아니 기도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다. 제대로 마음이 평안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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