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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Feb 09. 2021

히치하이킹 데뷔, 초심자의 행운이 필요해

탈린에서 히치하이킹 스승을 만났다

탈린에서 히치하이킹 스승을 만나다

탈린, 유럽 중세로의 시간여행

6월 드디어 두 달간의 러시아 횡단 여행을 마쳤다. 핀란드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유럽여행을 시작점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었다.

탈린은 유럽 중세의 건축과 문화가 살아 있어 묘한 시간여행을 떠나기 안성맞춤이었다. 탈린의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음이 들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따스하게 비추는 햇살, 6월에도 다소 선선한 공기는 걷기 여행에 제격이었다. 

구시가지로 접어서는 순간 동화의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수백 년 동안 맨질맨질하게 닳은 돌길은 골목을 이리저리 연결하고 있었다. 유럽 중세 특유의 건축 방식인 원뿔 모양 지붕을 인 돌집들은 기념품 가게, 식당 또는 카페로 변신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이었다. 골목은 오르막, 내리막, 평지로 끝없이 이어지다가 좁고 가파른 계단이 보일라치면 어김없이 거리의 악사들이 나타나 흥겨운 멜로디를 연주하며 흥을 돋았다. 아기자기하고 개성 있는 공방이 줄지어 보이다가 좀 널찍한 장소가 나타나면 중세시대 복장을 한 청년들이 꿀이나 과일시럽이 발린 견과류를 구워 팔았다. 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저 골목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눈과 마음이 시간여행에 흠뻑 빠져들었다. 골목골목 이어진 구시가지에선 지도를 보지 않아도 좋았다.



탈린에서는 카우치서핑으로 알게 된 아데와 타이보 커플 집에서 며칠 신세를 졌다. 아데와 타이보는 무척이나 조용조용 말을 했고 조신한 몸가짐에 예의까지 바른 성격이었다.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어찌나 조심하는지 내가 주인인가 싶어질 정도였다. 특히 이 커플은 마음만큼이나 외모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새파란 눈동자와 금발에다 수줍게 미소 짓는 얼굴만 쳐다봐도 행복했다. 

아데와 타이보는 히피 축제에서 처음 만난 십 년 차 커플이었다. 삼 년 전 에스토니아 정부가 결혼커플에게 지원금을 준다기에 옳다구나 싶어 혼인신고까지 마친 정식 부부였다. 예술가인 타이보와 손재주가 뛰어난 아데는 근처 공장에서 생계를 위해 일을 했고 돈이 좀 모이기가 무섭게 짐을 쌌다. 이동은 히치하이킹으로 숙박은 텐트로 해결하며 틈 나는 대로 여행을 했다. 결혼 지원금 역시 여행에 알뜰하게 보태 썼다고 했다.


내가 도착한 무렵은 에스토니아의 독립기념일 겸 휴가 시즌이었다. 타이보는 친구네 야외 뜰에서 저녁에 바비큐 파티를 할 계획이었고 여기에 나를 초대했다. 소시지, 양념 되지고기와 각종 음료 등 먹거리를 잔뜩 사서 바비큐 파티를 시작했다. 잔디밭에서 여유로운 저녁을 즐기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경제와 정치가 EU에 종속된 에스토니아의 암담한 현실을 자조했지만 사실은 그마저 유쾌한 웃음 속에서였다.



히치하이커들의 만남

이야기가 무르어가는데 갑자기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갔지만 맛있는 음식과 그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대로 끝내기가 아쉬워 아무도 자리를 뜨는 이가 없었다. 자정이 넘어가도록 비 오는 밤 바비큐 파티는 계속되었다. 

아까부터 수시로 전화를 받던 타이보가 새벽 2시가 넘을 무렵 어디론가 사라졌다. 20~30분쯤 흘렀을까, 타이보는 비를 흠뻑 맞은 여행자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침 일찍 모스크바를 출발해 히치하이킹을 해서 막 탈린에 도착한 홍콩인 여행자 제프리였다. 초등학생이나 멜 법한 작은 크기의 백팩과 손에 쥔 일인용 텐트가 그가 지닌 짐의 전부였다. 옷 쪼가리 몇 개만 챙겨 들고 차를 얻어 타고 다니는 일명 히치하이커라고 했다. 


제프가 자리에 앉자마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아침에 모스크바를 출발해 새벽녘에야 탈린에 도착했으니 하루가 얼마나 길고 힘들었을지 훤했다.

“모스크바에서 트럭을 히치하이킹했는데, 아저씨가 정말 단 한 마디도 안 하더라고. 무서운 얼굴로 운전만 하는 거야. 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데 겁도 나고, 어색하기도 하고, 별의별 생각이 들더라... 탈린이 50킬로 밖에 안 남았는데 차를 잡기가 너어무 힘들었어. 비를 쫄딱 맞으면서 세 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오늘 도착 못할 것 같다고 타이보한테 전화하고 있었거든. 근데 마침 그때 정말 운 좋게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서더라고." 

타이보는 제프를 마중하러 갔다가 운전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비 맞는 불쌍한 히치하이커를 구원해 준 운전자는 다름 아닌 에스토니아에서 너무나 유명한 방송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제프는 베이징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해 몽골을 종단, 시베리아를 횡단, 막 유럽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이 모든 여정을 오로지 히치하이킹으로만 해 내고 있었다. 제프는 앉자마자 여행 이야기를 풀어냈다. 비록 말이 하나도 안 통했지만 여행자를 태워준 투박하고 무서운 러시아의 트럭 운전자들, 여권에 꽂아 둔 150 달러를 스리슬쩍 훔쳐간 몽골의 국경 경찰, 대낮에 맥도널드 화장실 앞에서 자신을 빙 둘러싸고 협박하던 러시아 청소년 5인조 강도단 등등 히치하이킹 무용담이 술술 흘러나왔다.


알고 보니 아데와 타이보 역시 다년간에 걸쳐 잔뼈가 굵은 히치하이커들이었다. 이들도 곧 가세했다. 

"한 번은 부쿠레슈티로 가야 하는데 두 시간 넘게 차가 안 잡히는 거야. 그때 굴러가기는 할까 싶은 고물차가 우리 앞에 딱 서더라고. 일단 땡큐 베리 감사 탔지. 여차하면 뒤에서 밀 각오까지 했는데 근데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있는 대로 밟으며 달리는 거야. 어찌나 덜덜 거리는지 뒷좌석이 떨어져 나갈까 봐 손잡이를 꼭 붙잡고선 벌벌 떨었다니까. 루마니아엔 집시가 많아서 히치하이킹이 상당히 위험해. 운전자가 언제든 강도로 돌변할 수 있거든. 이탈리아에서는 히치하이킹이 씨알도 안 먹혀. 그 사람들은 히치하이커에게 눈길도 안 준다고." 



너는 어떤 여행을 하는 중이야?

아데, 타이보 그리고 제프의 히치하이킹 모험담을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내 지나온 여정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출국 당일 집 근처 청와대 인근에서 벌어진 시위 때문에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덕분에 여행은 한 주 미뤄졌었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타 2달간의 러시아 여행을 마쳤다. 숙소가 마땅치 않다는 이유로 핀란드 국경에서 억류될 뻔했지만 무사히 통과해서 지금은 탈린이었다. 

여행 도중 만난 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재밌는 친구들이 꽤나 많았다. 한 때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일명 히로뽕)을 직접 제조 판매했다는 러시아 친구는 이런 충고를 해 왔다. "매직 머시룸은 피하라고 말해 주고 싶네. 내 친구가 그거 잘 못 먹고 삼일을 못 깨어났었거든." 다른 세상 이야기 같기도 하고 때론 황당하고 소소한 사건과 갈등도 있었지만 대체로 무난하고 순조로운 여정이었다. 내가 평범하고 무난한 여행을 하는 동안 제프는 히치하이킹으로 자신만의 '모험'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히치하이킹은 무엇보다 위험부담이 커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러시아에선 히치하이커들이 종종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했다. 동유럽 일부 국경에선 자칫 히치하이커들이 장기 털리기 십상이라는 무시무시한 루머도 있었다. 나는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물었다. 

"제프, 넌 겁이 없니?"



낯선 곳이 익숙해지는 순간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카우치 서핑으로 만나게 된 우리 넷이 한 집에 머무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낮에는 각자의 일을 보고 밤 9시가 되면 다들 집 부엌으로 모였다. 돌아가면서 요리를 준비하고 늦은 저녁을 함께 먹었다. 한국식 비빔밥도 만들어 먹고, 보도 듣도 못한 터키식 카레도 등장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타이보는 자신이 직접 담근 수제 와인이나 맥주를 주섬주섬 꺼내 왔다. 그러면 하루의 수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간을 잊은 수다는 해가 어스름이 밝아오는 새벽 세네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중세에 온 것처럼 낯설던 탈린의 골목골목이 내 이웃처럼 익숙해졌다. 괴팍한 사람들이면 어쩌나 걱정하고, 첫 만남에 왠지 서먹했던 이방인들이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졌다. 이제 탈린을 떠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된 것이다. 사실 오라는 사람도 없고 딱히 가야 할 곳도 없었지만 여행자의 숙명처럼 나는 다시 길 위로 나서야 했다. 


나는 일단 라트비아를 향해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제프는 동남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의 도시로 갈 예정이었다. 역시나 틈만 나면 여행 떠나기 바쁜 아데와 타이보도 주말 동안 '오리엔티어링'이라는 스포츠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떠날 예정이었다. 

제프는 여느 때처럼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아데와 타이보는 베테랑 히치하이커답게 지도를 펼쳐 놓고 제프가 차를 잡을 수 있는 최적의 히치하이킹 포인트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히치하이킹이란 태생이 히치하이커인 사람들만이 해 내는 모험처럼 들렸다. 며칠 전에야 히치하이킹에 대해 주워들은 나 같은 여행자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도로에서 차를 잡으려고 쭈뼛거리며 서 있는 상상만 해도 심박수가 올라가고 손에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진짜배기 모험을 해내는 이들 히치하이커야말로 진정한 여행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본 투 비 히치하이커'들 앞에서 어깨가 작아지고 허리가 쭈그러들었다.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나는 왜 할 수 없나 자괴감도 들 던 그때,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 밖으로 한 마디를 뱉어냈다. 

"근데 있잖아, 나도 오늘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해 보고 싶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나도 히치하이커가 될 수 있다 

아데, 타이보, 제프 이들은 노련한 히치하이커들답게 돌발상황에서도 침착함이 돋보였다. 나 같은 초짜의 기를 죽인다거나 겁 주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모험가다운 반응이 나왔다. "쿨!"

그들은 지도를 돌려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선 내가 어떻게 목적지에 갈 수 있는지 다 함께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말을 행여 한 마디라도 놓칠까 봐 나는 종이에다 깨알같이 받아 적기 시작했다. 타이보는 서랍을 뒤적거려 교통카드를 쥐어 주었다. 

"일단 이걸로 버스를 타." 

내 마음이 바뀔세라, 이들은 나에게 배낭을 짊어 지여 주고, 물병도 꽂아 주고, 히치하이킹에 쓸 사인보드도 준비해서 들려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대로 꼭 전화하라며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히치하이킹 어린이를 위한 보호자들의 책임감은 막중했다. 우리는 서로서로 포옹을 마치고 재빨리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프는 떠날 시간이라며 나를 끌고 현관을 나섰다. 뭐에라도 홀린 듯 순식간에 벌어지는 중이었다. 


목적지 따위는 상관없이 나는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제프 뒤를 졸졸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우리는 버스정류장부터 달랐다. 제프는 작별인사를 건네기가 무섭게 버스를 타고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나의 첫 히치하이킹 목적지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대학생들의 도시 타르투였다. 아데와 타이보가 일러준 대로 일단 버스 종점에서 바로 다음 버스를 탔다. GPS 지도가 깔린 스마트폰을 꼭 움켜쥐고 히치하이킹하기 좋은 세상이라고 중얼거렸다. 쭉 이대로라면 히치하이킹 시작 지점을 찾는 게 어렵지 않을 듯했다. 

넉넉잡아 삼십여분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버스가 시내를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다. 어느덧 버스는 터미널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알고 봤더니 나는 반대 방향 버스를 잘 못 탄 것이었다. 버스 운전자에게 달려가 목적지가 적힌 종이를 펼쳐 보였더니 아저씨는 아예 나를 끌고 버스에서 내려 새로운 운전자에게 나를 인계하며 당부했다. 

"얘 거기 좀 내려줘, 응응 거기. 버스비는 받지 말고." 

친절한 기사 아저씨는 잊지 않고 나를 목적지에 내려 주었다.  

나의 히치하이킹 데뷔전, 탈린에서 타르투까지



히치하이킹엔 행운이 필요해

이제는 정말 혼자라는 걸 절감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탈린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먼저 방향을 확인해야 했다. 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했고 버스정류장 옆으로는 갓길이 충분했다. 이제 목적지가 적힌 종이 쪼가리를 들고 서 있기만 하면 되었다.

나의 첫 히치하이킹 포인트와 목적지를 적은 사인카드

도로 위를 달리는 차의 속도가 시속 80~100킬로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차량은 생각보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 운전자에겐 내가 보이지도 않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제 순전히 운에 달린 것 같았다. 초심자의 행운이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나 일단 그렇게 믿어 보기로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과 초조함만큼이나 모험에 대한 설렘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승용차 한 대가 전방 10미터 앞에 멈추어 섰다. 이렇게나 빨리 차를 잡다니 나는 길가에 내려 두었던 배낭을 얼른 들쳐 메고 쏜살같이 뛰어갔다. 좋다고 뛰어온 히치하이커를 보고 여자 운전자는 놀란 눈으로 '쏘리'를 외쳤다. 알고 봤더니 뒷좌석의 아기를 돌보느라 잠시 차를 세운 참이었다. 그만 머쓱해져서 나는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십 오분쯤 흘렀을까, 파란색 승용차가 나를 쌩 하고 지나 치더니 천천히 속도를 늦춰 곧 이십 미터 전방에 정차했다. 이번에는 잠시 뜸을 들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려 봐도 나 말고 저 차가 설만한 이유는 없어 보였다. 운전자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배낭을 들쳐 메고 다시 한번 전속력으로 파란 승용차를 향해 달렸다. 허리를 숙여 보니 젊은 여성 한 분이 환하게 웃으며 채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나도 타르투로 가요, 타요" 

다정한 말투였다. 예상치도 않게 단박에 타르투로 가게 된 건 물론이거니와 거기다 여성 운전자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안전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나는"땡큐 땡큐"를 크게 외치며 배낭을 뒷자리에 던지고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운전자 이름은 마리, 에스토니아계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 대학원에서 심리학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휴가차 귀국했고 아침에 막 공항에 내려서 친정인 타르투로 가는 길이었다. 

마리는 학창 시절 히치하이킹을 자주 했었단다. 몇 년간 버스표를 끊어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왕년엔 숙달된 히치하이커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 남편이 일본계라며 무척 반가워했다. 사실 나는 일본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었지만 이럴 땐 굳이 급하게 친한 척을 해 본다. 


마리는 내 여행 이야기에 호기심을 보였고 나 역시 미지의 나라 미국에 대한 궁금증이 급작스레 생겼다. 서로 질문이 오고 가고 웃고 떠드는 사이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처음엔 낯선 운전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게 어색할 것 같더니, 막상 닥쳐보니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 드라이브를 함께 한 기분이 들었다. 

마리의 집은 타르투 외곽에 위치했다. 마리는 원래 계획을 바꾸어 나를 시내에 내려 주려고 일부러 길을 우회했다. 나야 덕분에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괜히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함도 들었다. 감사함을 표하며 차에서 내리려는데, 마리는 나중에 미국에 여행 오면 연락하라며 이메일 주소를 적어 주었다.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에스토니아에서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전화하라고 휴대폰 번호도 꼭꼭 눌러써 주었다. 연신 감사함을 표하며 차에서 내리는 나를 마리는 다시 불러 세웠다. 

"배 고플 때 이거 먹어." 

마리는 뒷좌석을 향해 팔을 휘젓더니 자신이 먹으려고 공항에서 산 게 틀림없는 샌드위치를 집어다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리는 나를 다시 차에 태웠다. 타르투 볼거리를 안내해 줘야겠다며 관광안내소를 찾아 직원과 지도를 붙잡고 심각한 얼굴로 의논에 의논을 거듭하며 '반드시 들러야 할 타르투의 명소' 리스트를 완성해 내 손에 안겨줬다. 이쯤 되자 마리가 잃어버린 내 언니인가 생각될 정도였다.

 

두렵고 겁나고 막막하던 히치하이킹 초심자는 전혀 기대치 못했던 넘치는 친절을 받고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마리는 저 철부지 히이하이커가 못내 걱정된다는 얼굴을 하고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운전대를 다잡고서,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을 향해 떠나갔다.  

나를 타르투로 데려다준 마리의 파란색 렌털 승용차



겁쟁이라도 얼추 히치하이커가 되어 갔다

2015년 한여름 유럽에서 첫 두 달 동안 꼬박 히치하이킹으로만 이동하며 여행을 했다. 차를 잡기 위해서는 뜨거운 땡볕 아래 걷고 또 걷고 더 나은 히치하이킹 포인트를 찾기 위해 무수히 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 이후에도 1년 반을 더 여행하며 '모험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마음이 동할 때면 어제든 히치하이킹에 나섰다. 그때 만난 90% 이상의 사람들은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물론 때때로 사건사고를 겪고 괴상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었다. 


'히치하이커에게 가장 안전한 나라, 덴마크에 온 걸 환영한다'는 운전자 아저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나를 고속도로 분기점 한가운데 내려주고 급하게 떠난 터키계 덴마크 운전자 아저씨도 있었고, 내가 떨어뜨린 아이패드를 싣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폴란드 트럭 운전사도 있었다. 그중 뭐니 뭐니 해도 최악은 세르비아 운전자가 내 말투가 자신의 기분을 거스른다며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나를 쫓아낸 사건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겪고 정신없이 해결하려 애쓰다 보니, 어느덧 그 시절 내 선망의 대상이었던 탈린의 본 투 비 히치하이커들을 얼추 닮아 갔다. 어느 날 내 모험 이야기를 듣던 아데와 타이보가 말했다. 

"이제는 네가 우리보다 더 프로 히치하이커 같아." 


히치하이킹을 나설라 치면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치 깜짝 선물 상자라도 열어보는 기분이 들었다. 낯선 이들이 베푸는 친절을 기대하면서도 그 친절이 행여 악몽이 되지나 않을까 늘 가슴 졸였다. 

히치하이킹은 목적지가 아닌 여정 자체에 즐거움이 있었다. 버스나 기차를 탔으면 이동 중에는 그냥 졸거나 멍 때리고 말았을 시간들이었다. 아무 기억도 없고 추억도 없이 족히 절반의 시간을 길에 버렸을 것이다. 반면 히치하이킹을 하는 동안에는 길에 내디딘 발걸음 하나하나, 마주친 사람 하나하나 기억에 오롯이 남아 있다.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독일, 덴마크, 스웨덴, 포르투갈 그리고 러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터키, 이란, 모로코, 튀니지 등등 길 위에서 마주친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운전자들이 초보 히치하이커를 위해 기꺼이 그들의 차문을 열어주었다. 또 한 번 만나고 다시 만날 일 없는 히치하이커에게 그들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때론 현자를 만난 듯 울림이 있었고 때론 소설이나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은 먹먹함이 남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기억이 더 지워지기 전에 내 마음에 수많은 별처럼 촘촘히 박혀 빛나고 있는 추억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되새겨 두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너 오늘은 어디로 가니? 잘 데는 있니? 동병상련을 느끼게 한 바이칼 호수 근처의 떠돌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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