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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May 09. 2022

나를 자유롭게 하는 힘 '내가 결정한다'

러시아의 보석, 상트페테르부르크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다는 백야(白夜). 자정이 다 되어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에는 어스름한 빛이 남아 있었다.

자다 말고 창문으로 환한 빛이 들어오길래 이제 기상할 때가 되었나 싶어 시계를 보면 새벽 2시였다. 당황스러운 심경으로 억지로 다시 눈을 붙였다. 이제야말로 아침이구나 싶어 눈을 뜨면 새벽 3시였다. 그렇게 몇 번이고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해야 마침내 진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버스면 버스, 공항이면 공항, 침낭 하나만 있으면 풍찬노숙, 불면의 밤을 모르던 나도 이곳에서는 날마다 잠을 설쳐대고 있었다. 한 여름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벨라야 노치' 백야 현상 때문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에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어느 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 때의 일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는 하루 24시간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중이었다. 강과 운하가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페테르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볼거리로 가득했다. 한낮에는 관광지와 카페에서 시원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다가 어스름한 빛이 남아 있는 밤이 되면 네바강을 따라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야경을 만끽했다. 자정 무렵 네바강에 놓인 다리가 열리는 진귀한 광경이 연출되면 사람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에르미따쥐 박물관의 은은한 조명이 강물에 비쳐 흔들거리면 강둑에 기대고 선 사람들의 그림자가 그 위에 포개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침부터 밤까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반짝반짝 빛을 내는 러시아 최고의 보석 같은 도시였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매번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 러시아 여행의 종착지였던 이곳에 흠뻑 반해 버린 나는 도시를 열심히 헤집고 돌아다녔다. 백야가 시작된 페테르에서 낮은 낮이고 밤도 낮 같은 하루는 길었다. 떠날 때가 다가오자 내가 한동안 이곳에 살았던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네바강에 놓인 다리가 하나 둘 열리는 순간, 거대한 배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진다


이 중에 누가 '좋은' 사람일까, 어떡해야 '좋은' 사람만 만날 수 있는 거지?

페테르를 떠나 다음 목적지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를 택했다. 여태껏 그랬듯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있던 건 아니었고 그저 헬싱키행 버스 값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핀란드나 헬싱키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여행책자엔 시시럭한 단편 정보의 나열뿐이었고, 인터넷으로 검색한 정보도 하나같이 신통치가 않았다. 핀란드를 어떻게 여행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행이 곤란하다 싶을 때면 나는 '세 개의 복주머니' 마냥 카드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바로 여행자들의 커뮤니티  '카우치서핑'을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카우치서핑은 여행자들끼리 숙박을 공유하는 비영리 커뮤니티를 말한다. 이곳을 통하면 보다 현지인들 생활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문화를 경험하고 관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나는 카우치서핑 홈페이지에 접속해 핀란드 헬싱키에 등록된 호스트 목록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또다시 시작되는 고민 타임이다. '별처럼 숱하게 많은 사람 중 과연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 걸까?' 대도시일수록 카우치서핑 이용자들이 많았고 누구를 택해야 할지는 번번이 갈등이었다. 나는 우선 여성 호스트로만 추려보기로 했다. 족히 만 명에 육박했다. 그렇다면 나이가 너무 어리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딱 내 나이 언저리 정도면 어떨까, 여전히 수천 명이다. '이 많은 사람 중 대체 누가 좋은 사람일까, 이 사람이 안 된다고 하면 그땐 어떡해야 하나, 만약 만났는데 이상한 사람이면? 자칫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지나 않을까...' 찰나의 순간에도 오만가지 상념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선택이란 쉽자면 너무 쉽고 어렵자면 한없이 어려워지는 법이다. '좋은 선택, 아니 최고의 선택'을 위해 나는 오만가지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대보다는 근심과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카우치서핑에 여러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래서 이용하는 게 꺼려지고 골치가 아팠다.  이쯤 되면 다 그만두고 차라리 게스트하우스나 알아보는 게 마음 편하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인 거야

헬싱키의 호스트 후보들을 보며 고뇌에 빠져 있던 그때 마침 신세 지고 있던 아파트의 주인 사샤가 나의 활동 근거지 주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샤는 이십 대 후반의 청년으로 페테르에서 공학 엔지니어로 일하는 중이었다. 내가 페테르를 여행할 계획이라는 걸 알자, 나의 러시아인 친구인 지마와 들랴 부부가 사샤를 소개해 주었었다. 사샤와는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내가 페테르를 여행하는 동안 기꺼이 자신의 집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었다.  


낮처럼 환한 한밤중 페테르에 도착한 나를 위해 사샤는 일부러 기차역까지 마중 나와 주었다. 고마움도 잠시, 사샤네 집에 처음 도착한 순간 나는 다음 날 곧장 숙소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샤가 가족과 함께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청년 혼자 사는 아파트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러시아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러시아도 그렇고 유럽에서도 낯 모르는 사람들끼리 성별에 관계없이 함께 집을 빌려 사는 경우가 흔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이상을 다 큰 청년과 한 집에서 지낸다는 게 내겐 영 마음 편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아파트는 다소 좁기까지 했다. 첫눈에 보기에도 사샤는 친절하고 예의를 갖춘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기차를 타느라 저녁을 걸렀을 손님을 위해 간단한 식사까지 준비해 놓은 걸 보면 배려심마저 깊어 보였다. 감사한 건 감사한 거고 그래도 사샤에게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해야 했다.

"사샤, 나를 손님으로 받아주어서 고마워. 그런데 실은 내가 러시아어가 부족해서 네가 가족과 함께 사는 걸로 착각했었어. 가뜩이나 아파트가 좁은데 나까지 있으면 서로 불편할 것 같아. 오늘만 신세를 지고 나는 내일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나가는 게 좋겠어."

그러자 사샤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나는 정말, 정말 괜찮아. 너는 지마와 알랴의 친구니까 내 친구인 거나 마찬가지야. 나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 언제든 네 편한 대로 마음대로 공간을 써도 돼. 내가 불편할 까 봐 그런 거면 정말 괜찮아. 나 역시 너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러도 좋아."

왠지 주객이 전도된 듯한 상황이었다. 사샤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그럼 며칠만 두고 보자고 한 게 벌써 일주일째 체류 중이었다. 나는 주방에다 간이침대를 두고 공간을 독차지하다시피 거처하고 있었다. 사샤네 집에 머무는 동안 정말로 내가 주인이라도 된 것 마냥 편안함을 느꼈다. 사샤는 말처럼 아침 일찍 출근을 했고, 그러면 나는 얼른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식재료를 잔뜩 사 왔다. 그간 먹고 싶었던 한식을 마음껏 요리해다가 굶주린 나의 영혼에다 소울 푸드를 마구 공급해 댔다. 게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관광지는 물론이고 사샤가 소개해 준 숨은 명소들을 이곳저곳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적하고 아기자기한 공원, 비화가 있는 조그마한 다리, 허리를 숙여야 볼 수 있는 이색적인 조각, 재즈 라이브를 들을 수 있는 카페 등등 현지인만 알고 갈 법한 곳들이었다. 지적 호기심이 풍부한 사샤와 나는 함께 차를 마시며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사샤는 천진하고 솔직하고 한편으론 애늙은이 같아서 좋은 말벗이 되어 주었다. 애초 계획처럼 게스트하우스로 옮겼더라면 이런 훌륭한 현지인 친구를 얻지 못할 뻔했었다.


나는 주방으로 들어온 사샤를 붙잡고 푸념을 털어놓았다.

"지금 핀란드에서 카우치서핑을 하려고 검색 중인데 아이고, 호스트 찾기가 너무 힘이 드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도무지 모르겠어, 감이 안 와."

나는 턱을 괴었다. 그러자 사샤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대답을 했다.

"너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실은 처음 지마에게 너를 호스트 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두려웠었어.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외국인을 친구로 사귀어 본 적이 없었거든. 나는 영어를 못하니까 말도 안 통할 것 같고, 만일 성격이 괴팍하거나 집을 지저분하게 쓰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 사실 나한테 강박증이 좀 있거든. 엄청 망설였었는데... 그런데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네가 손님으로 있는 동안 그런 염려들이 싹 사라졌어. 좋은 사람은 말이야, 상대방도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내 말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일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말이야. 너 같은 여행자를 만나는 건 아주 신나는 일이거든.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네 여행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어. 앞으로도 계속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미래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

사샤의 말을 듣고 보니 느껴지는 게 있었다. '역시 일주일 동안 좋은 사람 코스프레한 효과가 있었구먼'하는 흐뭇한 생각도 없잖아 들기는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앞일에 대한 염려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계획을 꼼꼼히 세우고 상황과 결과를 강하게 통제하고픈 나의 성향은 일상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여행을 하는 동안 여러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말도 서툴고 환경도 낯설고 문화가 다른 곳에서 평소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리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책하고 실망하며 자신감을 조금씩 잃어갔다.  

순간의 선택을 죄다 모아 놓은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 인생에서 여행만큼 선택의 기로에 자주 서게 되는 때도 없다. 여행, 숨 쉬는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며 낯선 곳에서의 선택은 자칫 극단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결과를 예측하기 위해 끊임없이 의식이 작동했다. 아무리 머리에 쥐가 나도록 시뮬레이션을 해 본들, 잘 알지도 못하는 낯설고 새로운 곳에서 나의 예상대로 앞일이 펼쳐지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의 인식 저변에는 '미래란 이미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러니까 미래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상태이며, 그 안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미래를 생각하면 흡사 도박하는 심정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그림이 나올 미래를 선택할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그러니까 결과가 좋지 않다면 애초에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좋은 선택이 필수 불가결했다. 그러니 선택을 앞두고 내 머리는 이런저런 변수를 계산하고 재느라 복잡했고, 미처 고려하지 못한 요소가 있을까 봐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그러다 보면 선택은 자꾸만 미뤄지고 지체되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부랴부랴 결정을 내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미 결정된 미래가 없다면? 미래란 그때그때 만들어 가는 거라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떤 선택이 최선의 결과를 낳을지 미리부터 그렇게까지 전전긍긍할 필요 없다. 물론 첫 포문을 여는 고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만들고 이끌고 가는 과정이다.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든 간에 나의 방식대로, 나의 신념대로, 상황을 풀어가고 사람을 대하면 되는 것이다. 선택의 순간들로 점철된 여행에서 보다 필요한 능력은 예측력보다도 대응력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미래를 두려워하는 건 책임지기 싫다는 마음도 한 몫하고 있었다. 자꾸 선택을 미루는 건 손해를 볼까 봐서였다. 설혹 나의 선택으로 손해가 생기더라도 그걸 감수하고 책임지면 될 일이었다. 내가 결정하고 벌어진 일에 내가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마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등이 가벼워졌다. 헬싱키에서 마리아를 만나든 제인을 만나든 나는 그녀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나는 할 수 있는 걸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되었다. 그리고 일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대응하며 풀어갈 것이다. 그렇다, 미래는 내가 결정할 것이고 내가 오롯이 책임을 지면 된다.



여행을 통해 증명할 시간

생각이 정리되었고 그렇게 믿으며 따르기로 했는데 그래서 마음이 가벼워졌는데 가슴 한편에서는 슬그머니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미래를 올곧이 내가 결정한다는 걸 믿는다고 치자. 그렇다고 이게 진실일까? 만약 진실이라 해도 진실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믿습니다' 하나로 달랑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신(神) 할아버지가 와서 나에게 확신을 준다한들 하루아침에 태도가 달라질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스스로 미래를 결정한다'란 결국 나에겐 참과 거짓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명제에 가까웠다. 결국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증명해 낼 수밖에 없는 나만의 명제였다. 온몸으로 부딪치며 경험하다 보면 비로소 내가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지 어떤지 결론이 내려질 터였다. 그렇게 생긴 믿음이야말로 천년을 내려온 바위처럼 단단하고 또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 때에야 비로소 '나의'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떠나온 여행은 이를 시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철저히 혼자 여행 중이었고,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내 마음속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거칠 것도 방해될 것도 없었다. 몇 년이 될지 몇 달에 그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길을 헤매는 동안 무수히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될 건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그때마다 내 마음속 목소리를 따라 보기로 했다. 주저 없이 목소리를 따라 행동하자, 그리고 그때마다 정말로 길이 열릴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는 순간, 나를 증명할 진정한 나 홀로 여행이 시작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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