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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May 11. 2022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구

폴란드판 '사랑과 전쟁'

폴란드에서 히치하이킹이란

7월, 햇살이 환하게 부서지던 날이었다. 폴란드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도시 크라코우(크라쿠프)를 떠나 체코의 수도 프라하로 가는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이동은 히치하이킹이었다. 유난히 차를 잡기가 힘든 날이었다. 개인적 경험으로 폴란드는 히치하이킹이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였다. 폴란드에서는 보통 한 자리에서 두세 시간 삐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잘못된 포인트에 서 있었다거나 나의 인상이 운전자들에게 별로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차를 잡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늘 하나 없는 도로변에 서 있노라니 뜨거운 햇살 때문에 피부가 몹시 따가웠다. 차가 지나가면서 내는 굉음 때문에 귀는 먹먹했고, 도로에 가득 찬 매캐한 매연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히치하이커들이 공짜 차를 노리며 도로 옆에서 빈둥빈둥 하릴없이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 나름의 고충이 조금, 아주 조금은 있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삶이 그러하듯 말이다.

보통 히치하이킹 도중 운전자가 10~20 킬로미터 정도의 단거리를 태워 준다고 하면 대개의 경우 사양했었다. 괜히 엉뚱한 곳에 내렸다가 다음 차를 잡아 타기는커녕 그 자리에 갇혀 버리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폴란드에선 일단 차를 세워주기만 해도 뭔가 해낸 것 같고, 통한 것 같고,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멀리 가지 않아도 좋았다. 일단 태워만 줘도 감사였다. 오늘의 여정 역시 쉽지가 않았다.   

오늘 히치하이킹으로 가야 할 길,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체코의 프라하까지


 

폴란드판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징꾸이, 징꾸이, 징꾸이(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차를 갈아타기를 여러 번, 검은색 밴 한대가 내 앞에 멈추어 섰다. 역시나 이번에도 단거리였지만 그래도 한 30~40분 정도는 타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30대로 보이는 남자 운전자는 얼굴이 동글동글한 게 누가 봐도 무척 선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징꾸이를 또 한 번 외치며 나는 얼른 차에 올라탔다.

운전자의 이름은 도리안, 청소용역 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다. 그러고 보니 차 뒷자리에는 청소 도구가 잔뜩 실려 있었다. 사업이 잘 되냐고 물어보니 살포시 미소 지으며 그럭저럭 괜찮아란 대답이 돌아왔다. 한적한 국도를 막 지나가고 있는데 도리안이 황급히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내쪽 창문을 가리켰다.
"헤이 저기 봐봐, 저기 저기. 저기가 놀이동산이야."
나는 도리안이 가리킨 지점을 향해 재빨리 몸을 틀고서 고개를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열심히 돌려가며 창문 너머를 살폈다. "놀이동산 어디 어디?" 대체 어디를 가리키는 건지 모르겠다. 두리번거리는 사이 자동차는 어느덧 놀이동산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뜬금없이 놀이동산 안내를 듣고 보니 뭔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에게도 놀이동산에 신명을 바치던 시절이 있었다. 야간 운행이 끝날 때까지 타고 타고 또 타고 그러던 시절도 다 지나가고 이제는 놀이기구 위에 앉아 있으면 환호성 대신 속이 미슥미슥 울렁울렁 멀미부터 올라오고 만다.

"아, 너 아이 있나 보구나!"

도리안에게는 놀이동산에 열광할 법한 또래 자녀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니 남자 어른이 놀이동산의 위치를 알고 있지. 나의 예리한 추측에 새삼 내가 놀랐다. 가슴 뿌듯한 얼굴로 도리안을 쳐다보는데 그의 입꼬리가 심상치 않았다.
"응 있지. 일곱 살짜리 아들......"

도리안에게 아이가 있음을 맞추긴 맞추었는데 이거 뭔가 말을 잘 못 꺼낸 분위기였다. 뭐지, 하고 속으로 끙끙대고 있는데 도리안이 나에게 질문을 던져 왔다.
"넌 결혼했니?"

이러고 길바닥을 처돌아다니는데 했겠수?
"안 했으면 하지 마. 결혼 그거 별로야. 진짜 별로야."

도리안은 말(馬)처럼 길어진 얼굴을 하고선 불쑥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도리안은 이십 대에 결혼을 해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현재는 이혼한 상태였다. 도리안의 결혼 생활 이야기는 나에게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기시감을 들게 했다. '4주 후에 뵙겠습니다'란 대사가 인상적이었던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고 있지 않았나? 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복장을 터지게 하고 자연스레 뒷목을 잡게 만들던 마법의 막장 스토리 드라마 말이다. 사람 사는 곳이 거기서 거기듯,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여기 폴란드에서도 막장 드라마 한 편이 현실에서 펼쳐졌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깊은 한숨을 몰아 쉬던 도리안의 짧지만 슬픈 사연은 이랬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일찍 일을 마친 도리안은 퇴근을 서둘렀다. 가족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생각에 바삐 차를 몰아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만, 집에 들어서는 순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침실에서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방비 상태의 도리안은 두 눈으로 똑똑히 그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정신도 멍해졌다.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 그런지 화가 난다기보다 도리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꼴을 보고 도리안은 결국 이혼을 했다. 폴란드에서 이혼하는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하듯 아들의 양육권은 도리안의 전처에게 돌아갔다. 아들이 조금이라도 좋은 주거환경에서 자랐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도리안은 함께 살던 주택도 전처에게 줘 버리고 집을 나왔다.


"아니, 너의 전처에게 이혼 책임이 있는데 양육권을 그녀가 가져갔다고?"
나는 이 불합리한 상황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폴란드야, 이게 폴란드라고!"
도리안의 목소리에 울분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다 두고 맨몸으로 나온 도리안은 지금 조그마한 스튜디오에서 월세를 살고 있었다. 청소업체를 운영하며 번 돈을 전처에게 양육비로 주고 나면 자신은 임대료를 내고 생활하기에도 빠듯하다고 했다. 동글동글 젊잖은 인상의 도리안이 인상을 구기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 못돼 먹은 여자가 내가 부치는 양육비를, 어, 내가 번 돈을, 아들을 위해 쓰고 있는지, 지를 위해 쓰고 있는지, 어, 내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어떻게 믿어?"  
말까지 더듬더듬했다. 내면의 응축된 한(恨)이 있다면 바로 이런 걸까나? 한창나이에 돈을 버는 족족 원수 같은 전처에게 꼬박꼬박 부쳐줘야 하다니, 게다가 끔찍이 아끼는 아들도 주말에야 겨우 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냥 듣기에도 도리안의 처지가 너무 안 돼 보였다. 그의 울분이 충분히 이해가고도 남았다. '아이고, 난 못하리'란 속말이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헤이 히치하이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구

가까스로 진정하려고 애쓰는 도리안에게 뭔가 위로가 될만한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심각한 차 안의 분위기를 조금 밝게 바꿔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별별 일들이 생기나 봐' 근데 이건 도리안에겐 별별 일의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양육권을 대체 왜 준거야, 다시 뺏어올 순 없어?' 내가 법적 논의를 운운할 변호사도 아닌데 이건 내 주제를 넘었다. '아들이 엄청 보고 싶겠네' 당연할 걸 어쩌라고, 이것도 아니고. '몇 살 까지 양육비를 줘야 해?' 눈치 없이 팝콘 들고 나의 궁금증을 해결할 타이밍도 아니었다. 내가 짱구를 굴리다 굴리다 꺼낸 말은 결국 안 하니만 못한 질문이었다.

"넌 그럼 앞으로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어?"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라고, 심각하지 않은 척하려다 보니 심지어 내 말투는 명랑하기까지 했다. 도리안은 비장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버, 에버! 절대로! 다시는 안 해!"

단호한 도리안의 대답에는 비장한 결기까지 느껴졌다. 실제로 배우자의 외도는 천재지변이나 심각한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 느끼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수준에 버금가는 커다란 정신적 고통이라고 한다. 하물며 도리안은 배우자의 외도를 목격까지 했으니 자신의 인생이 순식간에 부정당하는 이상의 고통을 경험한 건지도 몰랐다.

"난 내 전처가 나를 그런 식으로 배신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어. 내 모든 것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아들과 사랑스러운 아내, 편안한 집. 그 행복이 계속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지금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 일이 끝나면 돌아갈 불 꺼진 작은 스튜디오 하나뿐이야. 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나는 왜, 왜 이렇게 불행해진 거지?"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말하는 도리안의 이야기를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까처럼 하나마나한 소리를 해 대느니 차라리 침묵이 나은지도 몰랐다.

"너는 결혼 안 했지? 그건 정말 운이 좋은 거야. 앞으로도 결혼 따위 할 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지 마. 너 혼자서 스스로의 행복을 좇으면 그걸로 되는 거야."  

천하 백수인 내가, 차나 얻어 타고 다니는 길바닥 떠돌이 생활자인 내가, 졸지에 청소업체 사장님인 도리안의 부러움을 사는 운이 엄청 좋은 사람으로 변신해 버렸다. 그렇다고 어깨가 으쓱해 지거나 딱히 기쁘거나 뭐 그런 기분은 아니었다. 결혼의 기역자도 모르는 내가 대체 결혼생활이라는 게 뭔지 어떻게 알겠으며, 또 한 것과 안 한 것의 차이가 뭔지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그저 나는 혼자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길바닥을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행복을 구하지 말라는 도리안의 마지막 말을 조용히 되새겨 보다가 번뜩 불교의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을 떠올렸다.

......

만남이 깊어지면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사랑으로부터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동행이 있으면 쉬거나 가거나 섰거나

또는 여행하는 데도 항상 간섭을 받게 된다.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사람들에겐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마음이 늘 한구석에 있다. 그게 자랑이든 상처가 되는 일이든, 오래된 친구처럼 나를 잘 알고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날때면 내 이야기를 속속들이 털어놓고 싶은 욕구가 덩달아 커진다. 그러나 때론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차마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면 오히려 낯선 이들 앞에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놓게 된다. 다시 마주치지 않을 거라는 안심 때문에, 나를 판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혹은 저절로 이야기가 나오게끔 만들어진 상황 때문에 등등 이유는 제각각이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도리안과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일부러 운전석에서 내려 내 배낭을 들어주며 배웅해 주었다. 함께 사진도 찍어주며 나의 여행길에 행운을 빌어주었다. 나 역시 그의 친절함에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또다시 히치하이킹을 이어가기 위해 한낮의 열기가 이글대는 도로 위에 섰다. 역시나 나를 태우려는 차는 좀처럼 나타나 주지 않았다.
도리안과는 비록 짧았지만 긴 여운이 남는 만남이었다. 동글동글 선한 인상의 도리안이 차츰 마음의 평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듬어진다고 하더라. 나는 숫타니파타의 구절을 다시금 되새기다 말고 어쩌면 도리안에게 꼭 필요할지도 모를 구절을 찾아냈다. 혼자서 정처없이 길바닥을 헤매일만큼 운이 좋은 나는 비록 인생에서 동반자와 '함께'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타니파타의 이 구절만큼은 도리안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다.

......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

"도리안, 그대 앞에 놓인 시간에 커다란 평안과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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