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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Jul 06. 2022

가난한 트럭 운전자와 속물 히치하이커

히치하이커의 열정, 어디로 갔어 이거?

우리나라에는 가구로 잘 알려진 보루네오 섬, 인도네시아에서는 칼리만탄이라 불리는 이 섬의 수도 폰티아낙에 머물 때였다. 값싸고 싱싱한 열대과일에 푹 빠져 살다 보니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겠더라는 핑계였고 사실은 이곳을 통과하는 에콰도르(적도)의 무더위 탓에 내 몸과 기분은 축축 늘어져 있었다. 절절 끓는 적도의 열기는 몸의 수분과 더불어 의지나 열정도 바싹바싹 말리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적도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는 게 모든 여행자들이 꼭 나 같지 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구 한복판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보며 내가 널브러져 있던 동안에도 최소 두 명의 여행자는 이곳에서 자신들만의 모험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영어가 능숙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친구 에릭을 통해 두 명의 여행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루는 에릭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브라질 친구라는 루카스가 전송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루카스는 칼리만탄섬 횡단에 나선다며 며칠 전 오토바이를 몰고서 폰티아낙을 출발했다. 황량한 사막지대를 건너고 있을 때 뒤에서 오토바이가 달려오나 싶더니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보니 머리에선 피가 흘러 떡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가격한 뒤 오토바이는 물론이고 배낭과 소지품까지 훔쳐가 버린 뒤였다. 다행히 루카스는 현지인에게 구조되었고 제때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었다. 모험담을 자랑이라도 하듯 그는 사진을 찍어 막 에릭에게 전송한 참이었다. “에릭! 내가 죽지 않은 건 천운이야!” 사진 속 주인공은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채 병원 의자에 기대앉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또 한 명은 우크라이나에서 온 20대 후반의 여성 여행자 마리아였다. 그녀는 프리랜서 기자로 평균 25킬로그램 무게의 배낭을 짊어지고 다녔다. 나는 배낭 무게가 12킬로그램을 넘어서면 여행이고 나발이고 배낭을 집어던지고픈 충동을 느끼곤 했다. 마리아는 배낭에다 액세서리를 잔뜩 짊어지고 다니며 그때그때 팔아서 여행경비를 충당했다. 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마리아는 폰티아낙을 출발해 순전히 히치하이킹으로만 칼리만탄 섬을 횡단했다는 거였다. 칼리만탄 섬 내륙은 심심할라치면 강도가 판을 치는 현지인에게도 악명 높은 곳으로 유명했다. 마리아는 혈혈단신 여성의 몸으로 이 험악한 섬에서 히치하이킹에 나선 것이다. 그녀는 제대로 된 숙소도 없이 현지인들 집에서 잠을 얻어자며 히치하이킹을 이어갔다.  섬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는 데에는 총일주일이 걸렸다고 했다. 나는 마리아의 대단한 무용담에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적도의 뜨거움을 만끽하며 칼리만탄 섬을 횡단한다면? 안 자고 안 먹고 24시간 주야장천 걷기만 해도 꼬박 13일이 걸린다.


히치하이킹, 여기선 그거 안 통하는데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고, 인도네시아는 아니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히치하이킹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외국 여행자들의 중론이었다.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현지인들은 히치하이킹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왜 공짜로 차를 얻어 타려고 하지? 남의 나라에 여행까지 왔는데 버스 탈 그까짓 돈 몇 푼이 없다고?” 몇몇 현지인들은 히치하이커 손에 돈을 좀 쥐여주고는 그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둘째, 신변 위험이 너무 컸다. 현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히치하이커란 자기 발로 차에 걸어 들어온 호구나 마찬가지였다. 운전자에게 소지품은 물론 영혼까지 털리기 십상이었다.  

마지막으로 히치하이커를 태운 운전자들은 결국 적절한 보상을 기대했다. 많은 경제 저개발 국가에서는 대개 도로 위를 달리는 건 뭐라도 순식간에 택시로 변신했다. 자동차든 트럭이든 오토바이든 자전거든 일단 낯선 이를 태우면 그 길로 택시였다.  종국에 히치하이커는 돈은 돈대로 나가고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상하는 수가 있었다.


이런 연유로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히치하이킹을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또 누군가는 기어코 이 모험을 해 나가고 있었다. 나도 그 모험 대열에 합류하고 싶었다. 사실 버스나 비행기로 이동하는 여정은 순탄하고 편안했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길거리 풍광을 감상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내 곯아떨어지거나 시간 때우기 급급한 나머지 결국 아무런 추억도 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가출한 히치하이커의 열정을 불러들였다. 마음의 준비는 끝났고 이제 적당한 때를 기다려 히치하이킹을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소소한 히치하이킹 팁:

인도네시아에서는 히치하이킹이란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길 위에서 마주칠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현지에서 히치하이킹을 대체할 법한 여러 후보 단어가 있었지만 나는 그중 'NUMPANG, 눔팡'을 선택했다. 눔팡은 단순히 '승차, 탈 것'을 뜻하며 딱히 무임승차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다면 사전에 운전자에게 요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괜찮겠냐는 확답을 받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야 가는 길에 마음이 편안하고, 내릴 때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을 것이다.



히치하이킹이 없는 인도네시아에서 히치하이킹에 도전하기

드디어 히치하이킹에 나설 때가 도래했다. 족자카르타에서 반둥까지 450킬로미터를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자고 결심한 것이다. 특별한 동기는 없었는데 굳이 꼽자면 주변에서 히치하이킹을 말리는 사람이 그나마 덜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간 히치하이킹을 하자고 결심은 했는데 막상 내가 히치하이킹 이야기라도 꺼낼라 치면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듣기에도 황당하고 위험하고 바보 같은 시도를 하려는 사람으로 낙인찍혔고 현지인들의 엄청난 잔소리에 시달렸다. 이해했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약 90퍼센트는 무슬림이었고, 내 친구들은 역시나 독실하고 보수적인 무슬림 여성들이었다.   


그야말로 오랜만의 히치하이킹이었다. 히치하이킹 시작 부근에는 대형 규모의 주유소와 휴게소가 위치했다. 나는 '눔팡, 반둥'이라고 쓰인 종이 쪼가리를 꺼내 들었다. 운전자들 보란 듯 그러나 세상 숫기 없게 쭈뼛대며 나는 주유하는 차 옆을 어슬렁댔다. 운전자들은 하나같이 행여나 나랑 눈이 마주칠 까 봐 애써 피하는 것만 같았다. 하기야 여기서 반둥까지는 무려 50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장거리였다. 단박에 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방증이라도 하듯 나와 살짝이라도 눈이 마주친 소수의 운전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갔다. 새벽부터 설치며 길을 나선 보람도 없이 해는 점점 뜨거워져 갔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다 팽개치고 일단 휴게소 식당에 들어가 뭐라도 좀 먹기로 했다. 


나의 모든 게 장애물이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현지어를 할 줄 모르는 게 가장 큰 장애물 같았다. 언어가 안 통하면 손짓 발짓이라도 해야 하는데 나는 그것마저 영 소질이 없었다. 

그때, 상대적으로 젊은 남자 운전자 한 명이 내 눈에 띄었다. 드물게 안경까지 끼고 있는 게 스마트해 보였다. 4시간 동안의 기다림을 끝내자 싶어 체면도 없이 다짜고짜 운전자에게로 돌진해 말을 걸었다. 운전자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가는 데까지만 좀 태워다 주면 안 될까요?”

운전자는 망설이다가 이내 수줍은 목소리로 타라고 응답했다. 운전자가 마음을 바꿀세라 나는 몸을 던지듯 차에 올라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자가 머뭇거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달랑 10분 거리에 불과했고, 나는 거의 승차와 동시에 하차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차 히치하이킹에 성공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싶었다.

나는 조그마한 주유소 앞에 내리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먹어 두고 비워 두는 게 나 같은 히치하이커에겐 세상 중요한 일이었다.

족자카르타에서 반둥까지의 여정은 약 450킬로미터였지만 길이 험해서인지 차로 꼬박 달려도 10시간이 걸렸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첫 히치하이킹에 성공하자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사진을 찍어가며 주유소 사장님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때 노란색 트럭 한 대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주유소 입구에 멈춰 섰다. 설마 하는 순간, 트럭기사가 창 밖으로 얼굴을 쑥 하고 내밀어 나에게 트럭에 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운전자 아저씨의 덧니 웃음이 유난히 순박했다. 심지어 아저씨는 반둥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400킬로미터를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다니 아침나절에 까먹은 시간을 벌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잔뜩 흥분하며 외쳤다.

"테리마카시(감사합니다)!"

운전자의 마음이 변할 새라 나는 주유소 사장님을 뒤로한 채 얼른 트럭 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암담할 때가 언제였냐는 듯 역시 운수 좋은 날이라며 혼자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나는 현지어를 할 줄 몰랐다. 서로 “어어”하면서 그저 웃음으로 의사소통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하 반둥?"

"이야, 반둥! 하하"

"하하 하하 하하하...."

이제 트럭을 타고 죽 가기만 하면 되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나는 그제야 주변을 찬찬히 관찰했다. 트럭 안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지저분했다. 내부는 온통 흙 먼지투성이 었고 시트 겉면은 뜯어져 나가 솜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덩그러니 놓인 쿠션은 때가 꼬질꼬질 묻어 있었다. 뭐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혼자 앉아서 가니 딱히 불편할 건 없었다.

길 옆으로 보이는 풍광도 좋고, 날씨도 좋고, 운전자 아저씨의 마음씨도 좋아 보였다.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졌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트럭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이었다. 오늘 안에 도착은 하겠나 싶은 의구심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20여 분쯤 달렸을 때 전방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는 마치 약속이라도 된 듯 그들 앞에다 차를 세웠고 대화가 길어지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협상을 하는 것 같았다. 이내 모두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갑자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운전자 아저씨는 차에서 내려 트럭 뒷문을 열어젖히자 길 한편에 잔뜩 쌓여 있던 물건들이 줄줄이 트럭으로 옮겨졌다. 처음엔 물건만 실어 나르는 줄 알았는데 짐 싣기를 마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차에 올라탔다. 무슨 상황인가 당황스러웠다. 내가 앉아 있던 2인용 같은 1인용 조수석에 난데없이 아저씨 한 명과 소년 한 명이 합류했다. 의자에 놓여 있던 짐을 뒤로 치우고 내 배낭도 치우고 그래도 공간이 협소했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의자 귀퉁이에 겨우 엉덩이만 걸친 꼴로 앉게 되었다. 만약 손을 앞으로 짚어 지탱하지 않았더라면 그 귀퉁이조차 사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불편함도 문제였지만 내가 아저씨의 비즈니스를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은 염려가 들었다. 운전자 아저씨는 특유의 순박한 덧니 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앉아 있어도 괜찮다는 표시를 해 왔다.

빈 트럭으로 10 시간을 가야 할 아저씨에게 갑자기 일거리가 생겼다


손에 땀을 쥐는 빗속의 질주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갑자기 도로 위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열대 기후의 세찬 스콜은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데, 경험해보면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도로는 순식간에 강줄기로 변했다. 누군가 양동이를 들고 쉴 새 없이 푸억 푸억 물을 퍼부어 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트럭의 와이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한 쌍의 와이퍼 중 운전석 쪽은 아예 움직이질 않았고, 나머지 한쪽은 댕강 부러진 채 작동이 되다 말다 했다. 비는 억수 같이 퍼부어 대는데 도무지 앞이 보이질 않았다.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운전을 하다 말고 몸을 밖으로 내밀더니 오른손으로 와이퍼를 수동 작동시켰다. 세찬 빗줄기 속에서는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고 아저씨의 상반신은 이미 비에 흠뻑 젖어 버렸다. 트럭은 시속 30~ 40킬로미터로 겨우겨우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 와중에도 운전을 멈추지 않는 아저씨가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너무나 불안해 보였다.


사실 트럭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단 와이퍼만 문제가 아니었다. 전면 유리창은 굵은 금이 나 있었고, 조수석 쪽 창문은 삼분의 일쯤 열려설랑 더 이상 닫히지 않았다. 창쪽에 앉은 소년은 그 틈으로 들어오는 비를 손으로 막고 몸으로 맞으며 앉아 있었다. 좌측 사이드미러는 거울이 반만 남았고 백미러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운전석의 계기판을 덮은 플라스틱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굳이 이 비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대로 주저앉아도 전혀 놀랍지 않을 상태의 트럭이었다. 새삼 트럭이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는 게 새삼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말이지 이러다 사고가 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자 나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역시 이 상태로 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마침내 도로가에 차를 멈춰 세웠다. 트럭에서 내린 승객들은 비를 피해 재빨리 지붕 아래를 찾아 뛰어들었고 아저씨는 하늘에서 바늘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와이퍼를 고치기 위해 혼자 무던히 애를 썼다.


이대로 아저씨와 함께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반둥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하자 여기가 어디쯤이고 여기서 또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히치하이킹에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세상 막막한 심경을 하고서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아저씨는 와이퍼를 대충 고쳤는지 이만 출발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여전히 빗줄기는 거셌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던 나는 일단 트럭에 다시 올라탔다. 아저씨의 고군분투는 보람도 없이 와이퍼 작동이 딱히 나아진 건 없었다. 



공짜가 없는 눔팡

아까 차에서 내렸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만큼 비는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상황이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되자 이제 다른 근심거리가 떠올랐다. 이렇게 허름한 트럭을 모는 아저씨인데 경제사정은 당연히 넉넉지 않을 거였다. 중간에 들렀던 조그만 점빵에서 아저씨는 점심도 대충 때웠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트럭을 공짜로 얻어 타는 게 미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아저씨에게 돈을 안 받는 거 맞냐고 미처 확인하지 못했었다. 인도네시아 히치하이킹의 기본 중의 기본을 까먹다니 어쩌면 아저씨는 돈을 바라고 나를 태워주었을지도 몰랐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트럭이 멈춰 섰고, 아까 짐을 실었던 이들이 다시 짐을 내렸다. 아저씨에게 운송비용을 지불했음은 물론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운전자 아저씨가 히치하이킹을 이해할 확률은 낮았고 그러니 나를 공짜로 태워줬을 확률은 덩달아 낮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돈을 드려야 맞겠다 판단되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숫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돈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돈을 드리면 얼마를 드려야 하나? 이만큼은 너무 많은 것 같고, 또 요만큼은 너무 적은 것 같았다. 진작 버스비 정도는 알아봐 둘 걸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풍광이고 뭐고 죄 뒷전이고 도대체 얼마를 지불해야 나도 손해를 안 보고 아저씨도 흡족할지를 계산하고 또 계산하느라 머리가 터져나가고 있었다.



가난한 운전자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지도를 확인하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반둥은 자바섬에서도 상대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자리해 기후가 시원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트럭은 오르막을 힘겹게 힘겹게 올라가는 중이었다.

벌써 트럭을 타고 이동한 지 장장 8시간이 넘어갔다. 한낮에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피곤이 몰려왔고, 점심을 대충 때웠더니 배도 고파왔다. 밤은 깊어가는데 아직 얼마를 더 가야 할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반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지인 친구 레니가 아저씨와 통화를 한 사실이었다. 내가 아저씨와 함께 가고 있다는 걸 아는 친구가 있으니 최소한 안전에 대한 염려는 붙들어 둘 수 있었다.

나는 긴 고민 끝에 드디어 아저씨에게 지불할 적정한 사례금을 결정했다. 아저씨에게 아예 돈을 안 드렸다가는 마음이 상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너무 많은 돈을 지불했다가 자칫 외국인은 호구라는 선례를 남길 수도 있었다. 사실 아저씨에게 돈을 넉넉히 지불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열 가지도 넘게 있었다. 이러저러한 모든 걸 종합한 결과 나는 적당한 액수를 정했고 이를 아저씨에게 건네기로 했다. 그렇게나마 결정을 내리고 났더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노오란 낡은 트럭은 어둠을 뚫고서 무거운 몸을 게우게우 끌어가며 오르막 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깜깜하던 주변이 어느 결에 환하게 밝아지는가 싶더니 집이 하나 둘 보이고 건물도 눈에 띄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것 같았다. 아저씨는 내 친구 레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만날 지점을 의논하는 것 같았다. 무려 11시간 만에 드디어 이 낡은 트럭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나는 속이 다 후련했다. 이렇게 후지고 불편했던 트럭과 그보다 더 불편했던 내 마음과도 곧 안녕이었다.


시내로 들어선 아저씨는 커다란 쇼핑몰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적당한 지점에다 트럭을 세웠다. 길고도 긴 하루의 끝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나는 트럭에서 내릴 준비를 마치고서 아저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서는 손에 꼭 말아 쥔 돈을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금액이 너무 적어 행여라도 아저씨가 실망할지도 몰랐다.

아저씨는 순간 멈칫하는가 싶더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내 손을 자세히 들여다 보지도 않더니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아저씨는 특유의 순박한 웃음을 한껏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넣어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미처 예상치 못한 아저씨의 반응 때문에 이번에는 내가 더 당황했다.  아저씨가 돈을 보고 좋아해야 되는데, 더 달라고만 안 해도 감사할 일이라 생각했는데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저씨는 끝까지 순박한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손짓으로 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갈 길이 바쁘다는 듯 이내 노란 트럭을 몰고 떠나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둥을 향해 산 등성이를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트럭들



그리고 속물 히치하이커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저씨가 떠나 간 방향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사례금으로 얼마를 지불할지 그토록 고민을 거듭했건만 결국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니 그보다 나는 은연중 아저씨를 오해하고 무시했다. 낡은 옷차림을 하고 덜덜거리는 트럭을 모는 사람이 외국인 히치하이커를 태웠을 땐 으레 금전적 보상을 바랄 거라 짐작했다. 설사 돈을 기대하지 않았더라도 주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을 거라 예상도 했다. 나는 그래도 더 잘 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인색해 보여서는 안 된다는 심리적 부담도 느끼면서 말이다.


거의 포기할 뻔했던 나의 히치하이킹 여정에 희망과 커다란 기쁨을 몰고 와준 노란 트럭 운전자. 아저씨는 대가 없이 낯선 외국인에게 기꺼이 차문을 열어 주었다.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하루 종일 운전을 하고도 끝까지 히치하이커를 목적지까지 바래다주었다.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고 한결같은 호의를 베푼 채 홀연히 사라져 간 아저씨는 가난한 운전자였다.

나는 겉으로는 '현지인들을 이해해야지. 현지인들과 어울려야지'라고 다짐했지만, 은연중 ‘저 사람은 나보다 가난하겠군. 저 사람은 도움을 베풀 처지가 아니겠군’하고 가난한 현지인들은 순수한 호의를 베풀지 못할 거라 믿었다. 정작 돈 몇 푼 아낀답시고 아저씨에게 음료수 하나 대접할 여유가 없었던 건 바로 나였다. 처음 아저씨에게 가졌던 고마운 마음은 어느새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대신 '뭐가 이렇게 가난해. 뭐가 이렇게 더러워. 뭐가 이렇게 위험해' 속으로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속물 히치하이커였다.


나는 배낭을 메고서 아저씨가 떠나 간 방향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나 자신이 그리고 아저씨에게 내밀던 내 손이 부끄러웠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부끄러웠다. 늦은 밤 반둥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우산을 꺼내 쓸 수 없었다. 이토록 오만한 인간에게 우산은 무슨 우산이라니, 비를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다. 마중 나온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나는 멍하니 그리고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돌부처처럼 꼼짝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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