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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Dec 17. 2020

서울역 노숙자가 남일 같지 않다

금요일 밤,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 내려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자정이 다 되어 오는 시각, 텅 빈 광화문에서 이제야 집으로 가려고 서 있어보면 북적임 뒤 찾아온 고요함이 느껴집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길어야 15분 남짓한 그 시간에 느껴지는 도심의 분위기는 쓸쓸합니다. 매번 느끼지만 또 매번 특별한 감상을 가져다줍니다. 금요일 밤 반복된 풍경입니다.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오른 지하철에서 글쎄 서울역까지만 운행한다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서울역 바로 한 정거장 뒤가 시청역이거든요, 저는 툴툴거리며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그 한 정거장을 위해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게 벌써 10분이 넘어가더라 말입니다. 성질 급한 저는 이내 발을 동동 거립니다. 거 몇 분 늦는다고 세상이 달라질 일이 집에 꿀단지도 없는데 괜히 마음만 급해지는 거지요. 그때 문득 '맞다, 서울역에서도 버스 탈 수 있었지.' 아이고 참, 이 생각을 왜 이제야 했나 말이죠. 유연한 사고 유연한 태도가 자동으로 나오는 게 아닌 건 확실합니다. 저는 별로 유연하지가 않아서 뒤늦게야 그렇게 할껄하는 후회를 곧잘 하곤 합니다.


일단 서울역 지하철 개찰구를 나왔습니다. 자 이제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나, 대충 감을 활용할 차례입니다. 출구 번호 하나를 찍어봅니다. 그렇다면 곧장 직진입니다. 눈 앞에 나타난 통로는 상당히 길게 이어지다가 종내 6,7번 그리고 8,9번 출구로 갈라집니다. 일단 발걸음을 한 걸음 떼 놓습니다.

얼마 안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통로 입구에서부터 누워 있는 사람이 한 둘 보이더니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누워 있는 모습이 언뜻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서울역 노숙자 분들이 주무실 채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낮에 서울역에 와 보면 노숙자분들이 역사 광장 내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을 흔히 목격하는데, 밤이 되니 그분들이 이곳에서 잠드는 줄은 몰랐습니다.

일단 발걸음을 떼기는 떼었는데 망설임의 연속입니다. 괜히 지나가다가 저분들에게 봉변이라도 당하는 거 아닌가, 별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낮부터 알코올에 의존해서 지내는 분들을 종종 봤었거든요. 그래도 용기내어 발걸음을 떼어보았습니다.

자정이 다가오는 시각, 통로를 지나는 사람은 저 하나뿐입니다. 어디든 낯선 곳에서는 일단 경각심을 가지는 게 인지상정. 어떻게 주무시고들 계시나 한편으로 호기심도 일었지만 괜한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후다닥 걸음을 재촉해 어서 출구로 빠져나왔습니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네요, 밖으로 나오니 버스정거장으로 이어집니다 헤헤.

무사히 지하철 역을 빠져나와 버스에 앉았더니 마음이 그렇게 평온해질 수가 없대요. 갈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습니다.


그다음 금요일 밤이었습니다. 귀가 무렵이 되었고 저는 이번에도 시청이 아닌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자발적 하차. 서울역에 내리면 버스정거장까지 거리가 더 짧다는 장점이 있었는데요, 실은 그보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서울역이 가까워오자 지난주에 봤던 노숙자분들의 근황이 궁금해졌습니다. 추위가 점점 다가오는데 어떻게 잠자리를 마련하고들 있는지 걱정도 되고 염려도 되었습니다. 노숙자분들이 줄지어 누워 있는 통로를 두 번째로 지나가는 중입니다. 자정이 다된 시각 역시나 혼자 지나가고 있지만 지난번처럼 두렵지 않습니다. 마음의 여유까지 챙겨설랑 짐짓 발걸음을 늦추어 노숙자 분들이 누워 계신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렇다고 괜히 구경거리로 보는 듯 오해를 살까 봐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긴 통로를 통과하고 저는 이번에도 금방 버스에 올라앉았습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불 켜진 남대문을 지켜보는데 문득 여행할 때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건 동병상련이었습니다.


2년간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하는 동안 저에겐 하루하루가 고되었습니다. 여행은 그렇더라고요, 낯선 곳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것 그게 저에게는 여행이더라고요. 여행의 특별함이라면 일상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겁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간 무시했던 일상이 갑자기 너무 큰일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삼시세끼 해결하는 것도 큰일, 때맞춰 용변을 해결하는 것도 큰일, 이동수단을 찾는 것도 큰일, 잠잘 곳을 찾는 건 큰일 중에서도 제일 큰일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자전거 캠핑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때가 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다가 해가지면 텐트칠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적당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인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텐트를 쳐야 했는데 적합한 장소를 매번 찾아내는 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때론 캠핑을 포기하고 기차가 지나다니는 간이역 의자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공원 벤치나 스타디움 벤치에서 침낭만 뒤집어쓰고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텐트를 쳤다 해도 한여름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한기 때문에 몸이 점점 안 좋아지더라고요. 목에 염증이 심각해져서 결국 두 달 만에 스위스에서 자전거 여행의 막을 내려야 했습니다.

사실 노숙은 비단 자전거 여행뿐만 아니라 여행 내내 저와는 떼려야  수가 없었습니다. 여름휴가철 성수기에 숙소 방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더라고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밤새 내내 도시를 빙글빙글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피곤해져서 두오모 대성당을 바라보며 맞은  계단에 비스듬히 기대고 쭈그려 토막잠을 잤습니다. 베네치아에서는 바닷가 벤치에서 누워 잤고,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건물 계단 밑에다 박스를 깔고 잠을 잤습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는 맥도널드에서 새벽 2시까지 삐대다가 영업 종료 후엔 미라벨정원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밤을 새웠습니다. 한여름인데도 너무 추워서  돌아가는  알았습니다.  외에도 기차역, 공항, 버스정류장 등에서 노숙한   수도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매번 느끼던 거지만 지붕 없는 곳에서 맞이한 밤은 너무 길었습니다. 말이 좋아 여행이지, 저는 이성을 놓고 돌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저를 지켜봤다면 아마 미친놈 소리를 열 번도 더 했을 겁니다.  

추운 한 겨울 차디찬 바닥에다 종이박스를 깔고 침낭 하나에 의지해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목격했더니 여행하는 동안 각종 노숙을 일삼던 저의 처지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서울역 노숙자 분들이 얼마나 추운 밤을 보내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게 영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서울역 노숙자분들께 이토록 감정 이입하는 걸 보면 여행 당시 노숙하던 기억이 사무치긴 사무쳤었나 봅니다.

지금 저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고, 몸을 뉘일 따뜻한 바닥도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당장 꺼내 먹을 음식도 차고 넘칩니다. 깨끗한 욕실은 지척에 있고, 마음만 먹으면 따뜻한 물에 언제든 씻을 수도 있습니다. 여행할 때는 이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해결하는 게 그렇게 고되었는데 지금은 한 없이 사소한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시청 앞 지하철 역이 아닌 서울역에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노숙자분들이 이 추위에 어떻게 밤을 보내시나 문안 인사하듯 그 옆을 지나가 봅니다. 어제는 이어폰을 꽂고 지나는데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얼른 이어폰을 뽑고 무슨 노래인가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아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아~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구울" 지난 주에는 술 먹고 싸움을 했는지 고성이 난무하고 경찰도 와 있던데, 오늘은 노랫가락이라니 좋네요.

마음 같아서는 서울역 한편에 노숙자분들이 이용할 수 있는 따뜻한 샤워부스를 설치하고 싶습니다. 그 옆에는 샤워 후 갈아입을 수 있는 깨끗하고 빳빳하게 세탁된 중고옷을 비치해 두면 좋겠습니다. 머리를 빡빡 감고 묵은 때를 씻어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건, 밥 먹는 것 다음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인간다움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생각은 이전부터 서울역에 들를 때마다 하던 생각이긴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제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행 중 밤샘 노숙을 하고 하루 종일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녹초가 되었어도, 일단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기만 하면 거짓말처럼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나가더라고요. 아니 찬 물에 머리만 감아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습니다. 몸을 깨끗이 하니 무엇보다 정신이 맑아지고 없던 의지도 막 솟구친다고나 할까요. 마지막으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카아 그때 그 느껴지던 그 기분은 차마 잊을 수도 말로 다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모레도 서울역에서 버스를 탈 겁니다. 금요일 밤마다 서울역을 지나다 보면, 미쳐 돌아다니던 저의 여행 기억이 강제 소환되고, 지금 저에게 주어진 것들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는 걸 되새기게 됩니다. 이번 주 내내 한파가 닥친다는데 밤에는 노숙자분들이 또 얼마나 추울까 참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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