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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Jun 27. 2020

운명을 믿고 운명을 기다리는 너에게

실패든 성공이든 어쨌든 다음을 시작해야 한다


팔자소관(八字所關): 타고난 운수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

그러니까 한국을 떠나 있던 게 햇수로 7년, 그간 알고 지내던 친구나 지인 대부분과 연락이 끊겼다. 평소 나는 소셜 미디어 활동에 관심이 없었던 데다 핸드폰이 고장나거나 혹은 분실되며 사람들의 연락처는 자연스레 사라져 버렸다.

유라시아 배낭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뒤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학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오래전 그만두었던 전공을 다시 공부하고 싶어 학교에 재입학했고, 동기였던 친구 A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대학 과사무실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011로 시작하는 옛날 폰 번호와 지금은 안 쓰는 게 너무나 확실한 이메일 주소만 남아 있었다. 몇 개월이 흐르고 우연히 과 선배 한 명을 만나게 되면서 A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A를 마지막으로 본게 7~8년전일 것이다. 내가 코이카 봉사단원이 되어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던 해,  A는 식약처 근무를 그만두고 한의학 전문대학원에 진학했었다. 그냥 입학이 아닌 수석입학이었다. 지금쯤 졸업은 했을 거고, 개원을 했거나 병원에서 근무할 것 같았다. 똑똑한 친구라 어디서든 잘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고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드디어 연락이 닿은 A와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런데 의외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몇 년 전 한의전을 중도 작파하였고, 다른 일을 하다가 현재는 쉬고 있다는 거였다. 학교만 졸업하면 전문직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A의 사연은 이랬다. 4년 전 터미널에 마중 나온 아버지 차를 타고 고향 집으로 가던 중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사고 당시 머리를 크게 다친 A는 뇌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병원에서 의식이 깨어나던 순간 역행성 기억상실증을 겪었다. 갓 태어난 아기 상태처럼 과거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치료를 받으며 기억은 차츰 돌아왔고 약간의 후유증이 남았지만 다행히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졌고 학업과 주변 환경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A는 자퇴를 결심했다. 학교를 나온 그녀는 의학 글쓰기 관련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다녔다. 특유의 웃음을 씩 웃어 보이며 변함없는 차분한 목소리 톤으로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 뭘 할지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어. 일단은 좀 쉬면서 이것저것 찾고 있는 중이야."


 사실 나에게 한국에 돌아온 지난 1년은 히치하이킹 여행보다 자전거 캠핑 여행보다 더더욱 힘든 시간이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던 데다 소속된 곳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할 수 있는지도 몰랐던 그냥 하루하루가 불안한 날들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았던 시간은 '현실'에서 어떤 것도 보장해 주지 않았다. 과거의 추억은 머릿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고 나는 현실의 일상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내 궤적을 되살려 어떻게든 그것들을 연결시켜보려는 발싸심을 해대는 수밖에 뭐가 없었다. 그런 처지의 나에게 A의 쿨한 선택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명확한 목표와 방향, 창창한 앞날이 있는데 그걸 차 버리다니. A가 무심하게 내뱉은 말이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나의 귓가에 맴돌았다.

"다 팔자소관인 것 같아"

팔자라, 팔자. 그러니까 팔자가 정말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내 팔자는 뭔데?


운명( 運命): 앞으로의 존망이나 생사에 관한 처지 or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필연적이고도 초인간적인 힘

밝고 씩씩한 성격의 고등학교 동창 B는 대학교에 들어가자 곧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잘 만나는가 싶더니 6개월 뒤 성격차이를 근거로 헤어졌다며 B는 오밤중에 전화를 걸어왔다. 나도 한 번 만난 적 있던 이 커플은 동갑내기들답게 연인이라기보다 티격태격하는 재미있는 친구사이처럼 보였었다. 그래서 오래갈 거라 내심 짐작했었는데 반년만에 이별이라니 의외였다.

왜 이별이 힘든지 알리 없는 나는 사실 B의 슬픔에 공감하기란 무리였지만 나름 성의껏 그녀의 전화를 받았고 때때로 토닥여주기까지 했다. 친구는 처음 한 달 정도 힘든 내색을 보이더니 이내 덤덤해진 건지 어쩐 건지, 다시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B의 전 남자 친구가 군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B 역시 새 학기가 다가오자 휴학을 했고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졸업반이 된 B는 국방부 시계 역시 흘러 어느덧 제대해서 복학한 전 남자 친구를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잘 지내냐 인사라도 건넬 법했지만 B나 그녀의 전 남자 친구이나 둘은 서로를 아예 모르는 사람인 양 서로 지나쳐 버렸다. B는 곧 졸업했고 직장에 취업해서 바쁜 사회인으로 거듭났다. 누워서 천정만 보고 있어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는 법이었다.


내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날 무렵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어디 멀리 간다고만 해 놓았을 뿐 당분간 나를 찾지 말라고, 남들은 관심도 없는 걸 나 혼자 객기를 마구 부려대던 때였다. 마지막으로 B와 마주 앉아 있었다. 어디 가냐고 가르쳐달라는 친구를 나는 골리듯 헤헤 거리며 무시했다. "아무튼 멀리 가니까 하여튼 잘 살고 있어." 나의 작별인사에 B가 섭섭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엔 씩씩한 B가 그날따라 20% 더 차분해 보였다.

사실 여행을 하며 여러 차례 느꼈던 바인데, 사람들은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이에게 의외로 쉽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경향이 있다.

B는 뜬금없이 물어왔다. "니, 운명을 믿나?" 뭐, 운명? 운명이라... 운명이라... 건강 걷기 대회에서 밀가루 한 봉지조차 당첨돼 본 적 없는 내게 운명이니 소명이니 이런 건 꼭 남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B는 갑자기 이야기 하나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있잖아. 그 인연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야, 전 남자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했거든. 만약에 우리가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 친구가 먼저 연락해 오겠지,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겠지 계속 그렇게 바랬디래. 웃긴 게 뭐냐면 나는 아무 노력도 안 하면서, 위문편지 한 장 보낸 적도 없으면서 그 친구가 막 내 마음을 저절로 알아주지 않을까,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만 했거든. 근데 그럴 리가 없잖아.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있을 리가 없잖아. 진짜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게,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그냥 막 이뤄지는 줄 알았어. 내가 암것도 안 해도 저절로 될 줄 알았어. 아씨 다들 그랬잖아, 원하면 이루어진다매? 되려는 것들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매에! 근데 뭐... 니도 알다시피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드라..."

나는 우리가 없는 술을 마시고 있는 줄로 착각할 뻔했다. 무엇보다 B가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전 남자 친구를 마음에 담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세월 사이 나도 사람이 되긴 했는지 B의 가슴앓이를 느낄 수 있었다. 안타까워도 어쩌랴. 이제는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감나무 아래서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이, B의 첫사랑은 아득하게 멀어져 갔고 잡을 수 없을 만큼 사라져 버렸다.



운명아 너는 다른 사람 알아봐

운명, 이게 나의 운명일까 저게 나의 운명일까. 운명을 생각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의미부여가 많아진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어떤 행사에 참가해도 이게 다 내가 생각해왔던 일들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을 것 같은 강박관념이 생긴다. 자칫 경솔한 선택이 원치 않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까 봐 덜컥 겁도 한다. 생각에 생각이 거듭되다 곧 밀려든 생각의 쓰나미 속에서 허우적대기 마련이다. 선택에 따른 결과를 이리저리 시뮬레이션하다 보면 머리에 쥐도 나고 막힌다. 그럴 때면 어떤 이들은 역학자를 찾아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미래와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고 있다. 내 안의 목소리를 듣기보다 계속 외부 요인들에 마음을 쓰며 자꾸만 시선이 주의가 밖으로 밖으로 향한다. 나는 그 느낌이 참 싫었다.


내가 하는 선택이 옳은 것일까, 내가 가는 길이 맞을까 망설임은 수없이 많았다. 실패할까 봐 잘 못할까 봐 그래서 만회할 수 없는 길로 갈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운명이라는 건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지금 내가 하는 선택은 하나의 점에 불과할 뿐이다. 어떻게 이어질지는 나도 모르고 점쟁이도 모른다. 이야기가 다 끝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했던 선택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선을 그어 볼 수 있다. 그 점들이 이어지는 걸 이렇게 저렇게 지켜보다가 '와 이게 이렇게 연결될 수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 때야 비로소 운명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겠다. 운명이란 게 진짜 있을 수도 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듯, 나의 경험과 세상이란 미천하고 작아서 짐작조차 못하는 일들이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다. 설사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는 운명을 염두에 두고 싶지 않다. 여태껏 너무 무거웠다. 실패할까 봐 잘하지 못할까 봐 운명이 아닐까 봐 생각도 발걸음도 너무 무거워서 시작이 어려웠다.

대신 이제는 시작하고 싶다. 뭐가 운명일까를 생각하고, 운명이라서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이 닥쳐도 책임지고 해 나갈 강단과 배짱을 기르고 장착하고 싶다. 시행착오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면서 일단 시작하고 일단 행동하며 과정을 묵묵히 헤쳐 나가고 싶을 뿐이다. 운명 운운하는 이들 보란 듯 나는 이렇게 속삭이고 싶다. 솔직히 외칠 자신은 아직 없다.

"운명아! 너는 다른 사람 알아봐. 나는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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