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치는 무엇일까?
극강의 효율과 효용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미덕이라 여기는 나는, 사람이란 자고로 저마다 역할을 찾아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때에야 비로소 존재 가치를 발현할 수 있고, 존재의 의미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몸이나 마음이 병든 사람, 심각한 장애를 가진 사람, 혹은 기타 등등의 사고로 몸은 물론이거니와 사고조차 원활하지 않은 이들은 어떤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왜 존재해야 하는 가? 자연스레 의문을 가졌다. 나 역시 어느 때고 사고나 노화로 나의 역할을 잃어버릴 때가 있을 것이다.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하는 삶이라니 생각만으로도 견디기 어렵다.
97세 고령의 우리 할매는 어느 순간 급격히 기운이 쇠하였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동으로 눈을 감았고 자꾸만 잠에 빠지셨다. 육체가 완연히 지쳐있었다.
이미 4년 전 대퇴부 골절 수술을 받은 이후로 할매 곁에는 늘 사람이 있어야 했다. 보행기에 의지해서 화장실 출입을 할 정도는 되었지만, 그마저 불안해서 할매가 움직일라치면 꼭 사람이 붙어 있어야 했다. 고향에 내려갈 적마다 나는 할매의 손발이 되었다. 할매가 늘 일 순위였다. 나는 무언가를 하다가도 할머니가 움직거리기라도 하면 얼른 달려 나갔다. 수시로 할매를 모시고 산책도 다녔다. 자꾸만 떨어져 가는 인지능력을 회복시키려면 옆에서 수시로 말을 붙여야 했다. 내가 원하기도 했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피곤할 때면 아무 방해 없이 그냥 좀 가만히 누워있고도 싶었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몹시 번잡스럽고 귀찮은 일이었다.
할매의 기력이 급격히 쇠락한 뒤로 할매는 움직임 하나하나를 버거워하셨다. 움직일 때마다 아프다 하시니 아침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이 곱절로 들었다. 할머니를 지켜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괴로웠다. 삶이란 고통이 맞다. 무거워진 육신을 끌고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나, 삶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할매가 돌아가셨다. 돌아보면 불귀(不歸)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했을 법도 한데, 나는 왜 미처 생각지 못했을까.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할매의 커다랗고 따스한 손길이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는 할매의 온기 어린 손을 잡을 수 없다. 할매의 육신은 영영 사그라들었다. 할매의 존재가 눈앞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할매가 안 계신 고향집이 얼마나 삭막한지 비로소 깨달았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할매가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할매가 이 연꽃을 봤더라면 얼마나 좋아라 하셨을까, 아마 손뼉을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셨을 게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할매 좋아하시는 창난젓갈이 덩그러니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할매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한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은 무얼 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의미 있다는 것을 말이다. 건강하지 않아도 괜찮다. 똑똑하지 않아도 괜찮다. 잘 생기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그 존재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무게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앵두가 빠알갛게 주렁주렁 달릴 무렵엔 어김없이 할매 생신이 있었다. 그리고 올해부턴 우리 마을 어귀 연못에 홍련, 백련이 만개하면 할매의 기일이 돌아올 것이다. 연꽃은 해뜰 무렵에 활짝 핀다. 그럼 할매는 좀 서두르셔야 할게다. 할매가 그 연꽃을 보고선 얼마나 신나라 할지 생각하니 웃음이 나고 또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