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더위가 한 풀 꺾여 선선한 바람마저 부는 밤, 자전거를 붙잡고 집을 나섰다. 경복궁 돌담길 나만의 아지트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마다 마치 연어처럼 회귀본능을 일으키는 곳이다. 이곳을 찾기 시작한 지도 벌써 15년이 훌쩍 넘었을 것이다.
새로운 한 주를 준비하려 모두들 집으로 향한 일요일 밤의 광화문 풍경을 볼 때면 유난히 마음이 평온해진다. 주말 내내 관광객들로 쉼 없이 붐볐을 거리는 어느새 가로등만 총총 빛날 뿐이다. 나무가 드리운 그림자 아래로 나는 거침없이 달려간다. 방해할 사람도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는 텅 빈 거리에 서면 내 마음은 절로 여유를 찾는다.
우리 분독양 덕분에 나는 아지트에 단걸음에 도착했다. 참고로 분독이는 내 자전거 이름이다. 성은 차, 풀네임 차분독. 십여 년 전에는 이 담장 너머로 아주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는데 언제인가 다 잘려나가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빈 담장 위를 올려다봐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름달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인적 드문 깜깜한 공터를 자전거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듣고 싶은 노래 하나가 생각났다. 이름도 재밌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절룩거리네'. 이십여 년 전 처음 이 노래를 접했던 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비슷한 시기에 실연(失戀)한 동병상련의 두 사람이 노래방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이 찢어져라 노래를 불러젖히던 때였을 것이다 아마도. 가사 속 화자(話者)의 읊조림이 자못 정직하고 솔직해서 신선한 충격마저 안겨 준 노래로 기억되었다.
"...허구헌널 사랑타령 나잇값도 못하는 게 골방 속에 쳐 박혀 뚱땅땅 빠바빠빠
나도 내가 그 누구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놈이란 걸 잘 알아
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 아플 뿐인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근래 내 마음이 그렇다. 나이만 먹었지, 제대로 하는 거 하나 없고 제대로 할 수 있는 거 하나 없고 스스로를 돌아보니 초라하고 쓸데없기가 그지없어 보인다. 기회가 다가오지만 준비가 안 되었으니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런 지경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나의 습관이나 행태나 마음가짐 따위를 곰곰이 돌이켜보자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어느덧 서글픈 마음마저 이는 것이다. 가슴도 답답하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붙잡고 속을 털어놓고 싶은 것은 아니다. 누가 나를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분독양을 붙잡고 아지트로 달려온 것이다.
유난히 답답한 마음에 공터에 말뚝이라도 박을 모양새로 쉼 없이 돌고 또 돌았다. 왼쪽으로 돌았다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열 바퀴, 스무 바퀴, 백 바퀴도 거뜬히 넘었다. 하나도 안 힘들다면서도 절룩거리는 노래를 들으며 계속 자전거를 탄다. 스스로 바닥을 치는 느낌이 들 때는 진짜 바닥이 이런 거라고 냉정히 읊조리는 말이 도리어 위로가 된다. 어리석은 게 비단 나 혼자뿐 아니라 누군가도 함께 바닥을 치고 있다는 어떤 동지애가 느껴지기 때문일까?
'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들이 벌써 저렇게 실력을 쌓아가는데 나이 값도 못하고 아직도 이 수준이라니. 그런데 입은 또 어찌나 나불대는지 뻔뻔하기가 뻔뻔하기가 병신...... 아 근데 뭐, 뭐 어쩌라고? 내가 겨우 요 정도의 인간일 뿐인데 뭐 별 수 있냐?......'
마치 자아분열이라도 된 양 병신 등신 자학을 했다가 반박을 했다가 다시 또 재반박을 해대며 미친놈처럼 내 머릿속의 생각이 뒤엉킨다.
한 시간을 그러고 났더니 비로소 마음이 탁하고 풀린다. 그러고 보면 이게 다 내가 현재에 충실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들이고 생각들이다. 내가 슬럼프에 빠질 때란 영락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았을 때이다. 게으름을 피우고서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을 때,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할 때, 마치 세상에 가장 슬픈 존재라도 된 양 울적한 감정에 휩싸이며 스스로를 무능하다 꾸짖고 자책을 일삼는다. 뭐라도 하나 이뤄낸 성취감이 없으니 마음과 생각이 붕 뜨며 콩밭으로 가 버리는 것이다.
의외로 결론을 간단했다. 딴생각이 드는 때일수록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것. 슬럼프에 빠졌다는 그 감정에 빠져 있지 말 것, 하나라도 목표를 정해 붙잡으면 어느 결인가 감정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나는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너른 가슴을 기꺼이 내어주는 경복궁 돌담길, 항상 발이 되어주고 또 어떤 이야기도 묵묵히 들어주는 절친 분독양, 그리고 나의 루저 같은 이 마음을 너무나 적확하게 담아 노래로 만들어 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님까지 이 모두가 존재했기에 나는 복잡한 마음을 한결 덜어낼 수 있었다. 이토록 위로가 되는 명곡을 선사하고 소천(召天)한 달빛요정님의 명복을 빌며 나는 어둑어둑한 살구빛 경복궁 돌담길을 거슬러 귀가를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