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미 중 하나는 인터넷 쇼핑이다. 주로 식료품 구입이 목적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그 흔한 슈퍼마켓도 하나 없어서 나 같이 차 없는 사람은 온라인 쇼핑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원래도 인터넷 쇼핑을 좋아했다. 극강의 가성비를 따지는 나의 성미에 그야말로 딱이다. 대부분의 상품 가격은 오프라인보다 훨씬 저렴하다. 대신 많이 사야 한다. 양파 10kg, 당근 10kg, 닭 5마리 뭐 이런 식이다.
늙은 대학생인 나에게는 들어오는 정기 수입이 없다. 안 그래도 알아주는 짠돌이인 나는 틈틈이 핸드폰을 붙잡고서 최저 가격을 향해 오만사이트를 돌아다니곤 한다. 1년, 2년,... 온라인 쇼핑에 구력이 쌓이다 보니 내 나름의 알뜰 쇼핑법도 생겼다. 분명 돈을 내는 건 나인데 공짜마냥 횡재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럴 땐 참지 못하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도 택배를 보낸다. 갈수록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솔직담백한 스타일의 울 엄마는 이제 고만 보내라는 심기를 내비치셨다.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매일 택배가 배달되니 택배 기사님 보기에 덜 좋다는 것이다. 시골생활이라는 게 그렇다. 정 그러하시다니 이후로 나는 택배 보내는 횟수를 조금 줄였다. 그래도 아예 끊지는 못 하고 대신 고향에 내려갈 적마다 내가 왜 이런 택배를 보낼 수밖에 없었나, 엄마를 앞에 두고 구구절절 홈쇼핑처럼 설명을 해 대곤 한다.
다소 과장 섞은 나의 홍보에 엄마가 아주 드물게 대만족을 표현했다. 엄마도 온라인 쇼핑의 필요성을 비로소 납득하신 걸까. 나는 신이 나서 앞으로 엄마에게 이러저러한 것도 보내드리마 침을 튀기며 얘기했다. 듣고 있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나도 네 외할머니한테 이런 것 좀 보내드렸으면 좋았을 껀데 말이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신 지 한참 됐다. 그러니까 40년이 가까워 올 것이다. 안동이 고향인 엄마는 봉화로 시집을 왔다. 우리집 막둥이가 태어나고 아직 젖먹이 아기였던 시절 어느 밤이었다. 자정을 넘긴 한밤중 외할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느 어매가 오늘 밤을 못 넘기지 싶다."
3년 전 중풍으로 쓰러졌던 외할머니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었다. 차도 없고 버스도 없고 엄마는 갈 수가 없었다. 결국 날 밝을 무렵 새벽에 두 번째 전화가 걸려왔다. 외할머니가 임종했다는 비보였다. 언젠가 엄마가 들려준 외할머니의 마지막이었다.
"너희 외할머니가 교육만 제대로 받았더라면 아마 장관도 하셨을 거다."
외할머니는 안동의 엄숙한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총기와 재능이 비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교육시키지 않는 당시의 관습상 외할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못 했다. 대신 아이들이 외할머니 집으로 글을 배우러 올 적마다 문 밖에서 그걸 유심히 들었두었다. 말 그대로 어깨너머로 글을 깨친 셈이다. 외할머니는 뭐든 한 번 들으면 당최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단다. 역사책이며 옛날이야기며 읽고 듣는 대로 죄 머릿속으로 입력되었다. 글씨며 글솜씨도 좋아서 사돈지(민속 혼인할 신부의 부모, 특히 어머니가 신랑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는 물론 이야기책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외할아버지마저 막히는 게 있을 적마다 외할머니에게 물어보곤 하셨단다. 손재주도 좋았던 외할머니는 못하는 게 없는 다재다능한 분이었다. 다만 외할머니는 당신을 돌아보지 않는 애정 없는 남편과 평생을 살아야 했다. 사랑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오로지 살림 일구는데만 신경 쓰며 눈코 뜰 새 없이 일만 하셨다. 그리고 겨우 환갑을 넘기고 중풍을 맞아 쓰러졌다.
우리 엄마는 굉장히 쿨한 편이다. 에너지를 쏟아야 할 때와 아닐 때를 본능적으로 안다. 워낙에 매사 담담한 엄마는 외할머니가 임종하던 날의 일도 담담하게 말씀하길래 나는 엄마가 별로 안 슬픈 줄로만 알았다. 얼마 전 외할머니 이야기를 작은언니에게 했더니 언니가 말했다.
"나는 그날이 생각나는데. 새벽에 엄마가 전화받고 밖으로 나가 우셨어. 아부지가 나가서 엄마 위로해 주시던 것도 봤고."
그날 엄마가 울었다는 이야기를 엄마는 빠뜨렸다. 아마도 엄마는 그 긴 밤 내내 한 숨도 못 잤을 것이다. 엄마의 마지막을 보러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으니, 얌전하고 내색 않는 엄마 성격상 속으로 얼마나 발을 굴렀을까.
"그때는 돈을 받아서 살림을 했으니까, 엄마한테 뭐 하나 사 드릴 줄도 모르고. 나도 돈을 벌었으면 엄마한테 뭐라도 좀 사드렸을 걸 말이다."
엄마는 자식이 보내온 택배를 받으면서 엄마의 엄마를 생각했나 보다. 그러게나 말이다. 외할머니가 좀 더 사셨더라면 좋았을 걸. 그 아까운 재주를 펼치지도 못하고 평생 일만 하다 떠나셨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려서 기억도 안 나는, 사진으로만 봤던 외할머니의 무덤덤한 표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는 엄마를 닮았고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았다. 그러니 나는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겠다. 특히 내 큰 눈은 외할머니의 커다란 눈망울을 그대로 빼닮았단다. 나랑 닮은 할머니가 계시다면 신기할 것 같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늙겠지.
얼마 전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세상의 모든 죽음 하나하나를 만날 때마다 예전처럼 무심히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도 나에게는 엄마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오래 전부터 엄마가 안 계셨구나. 그리고 이제는 아부지에게마저 엄마가 안 계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