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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May 08. 2021

마당 솔과 마당 수세미의 재발견

씻어야 하는데, 그냥 내일 씻을까? 그래 내일 날 좋을 때 씻자. 벌써 3시네.

욕실 청소를 내일 하기로 마음먹는 동시에 나는 고무장갑부터 꼈다. 미루지 않고 해치워 버리자는 다른 마음이 행동을 선점한 것이다. 

나는 본가에 내려올 적마다 욕실 청소를 한다. 욕실 청소에 집착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어서 역시나 지나칠 수가 없다. 매번 하다 보니 구석구석 청소하는 나만의 방법이 다 생겼다. 다만 욕실 매트는 씻어두면 잘 안 마르기 때문에 겨울엔 욕실 청소를 햇볕 좋은 때로 골라야 한다. 그런데 이 욕실 청소란 것이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 걸리는 작업인지라 선뜻 마음이 잘 안 먹어진다. 여느 때처럼 '해야 되지만 일단 뒤로 미루자'하고 마음먹은 순간, 이제는 이놈의 고질병 좀 거스르자 싶어 그냥 해 버리기로 마음을 고쳐 먹은 것이다.


바지를 둥둥 걷고 온 사방에 물을 뿌려가며 청소를 시작했다. 역시 시작하니까 리듬이 생긴다. 깨끗해지는 바닥과 벽과 유리를 보고 있자니 역시나 시작하길 잘했다 싶다. 이제 욕실 청소의 마지막, 매트 씻기만 남았다. 매트는 마당 수돗가로 가져가 씻은 뒤 바로 햇빛에 말리기로 했다. 

욕실 매트가 나오니 주방 매트, 할매방 매트까지 발매트란 매트가 손을 들고 다 튀어나오고 있다. 이 녀석들은 미끄럼 방지용이라 홈 사이사이를 꼼꼼히 씻어야 한다. 마당 수돗가에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보자 보자, 욕실에서 가져온 깨끗한 솔과 마당 수돗가를 굴러다니던 때탄 솔 두 개 중에 어떤 걸 쓸까. 아무래도 깨끗한 녀석보단 만만한 마당 출신 솔을 골랐다. 이 녀석이라면 아무리 세게 문질러대도 휘어지든 부러지든 때가 더 타든 말든 부담이 없다. 수세미까지 찾아서 온 힘을 다해 문지르고 닦아 댄다. 이럴 때 팔뚝 근육이 참 도움이 된다. 햇살이 따뜻해도 바람이 휘몰아치니 덥지도 춥지도 않고 딱 좋은 계절이다. 봄바람은 저기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봄은 '풍목(風木)의 기운’이라는 말을 여실히 느끼며 일하는 게 이렇게 즐거웠던가 싶은 마음에 절로 흥겨워진다.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해, 일을 미루고 싶을 때일수록 그 일을 해치우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하였을 때 경험할 희열은 이번 매트 씻기에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매트를 하나씩 하나씩 씻어 난간에 널었다. 햇볕과 바람 덕분에 금방 마를 것이다. 뒷정리를 하던 나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끄무리한게 우중충하게 때 탄 마당 솔이 어느덧 뽀얀 얼굴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닌다. 이 녀석이 아까 그 녀석이 맞나. 심지어 욕실 솔보다 더 깨끗해져 있었다. 

수세미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주방 접시 수세미로 쓰이다가 밀려나 마당으로 나온 처치의 수세미들. 이 녀석들도 어느새 주방 애들보다 더 선명한 노란색, 분홍색을 띠고 있는 게 아닌가. 비닐에서 갓 튀어나온 새것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뭐지? 때를 씻는 용도로 썼더니 때를 묻힌 게 아니라 자기들의 때도 씻어 버린 솔과 수세미. 일을 할수록 닳는 게 아니라 더 빛이 나다니, 놀라운 발견이었다. 말간 얼굴을 한 수세미 형제가 봄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수돗가에 잘 묶어 두고 솔도 한쪽으로 가지런히 재워 놓았다.


그런 거였구나. 일을 미루면 미룰수록 마음은 계속 거기 묶여 있어야 하니 괜시리 기운이 방전되고 만다. 정작 생각났을 때 바로 해치워버리면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지는가. 일하는 중 경험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또 막상 일을 한다고 해서 에너지가 닳아지는 게 아니었다. 더 개발되고 발전되는 거구나.

마당 솔과 마당 수세미는 이치를 툭하고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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