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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Oct 03. 2021

잃어버리지 않고도 소중함을 알 수 있다면

누가 그랬던가, '인간의 비극이란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라고.

40여 년의 인생을 살면서 지금껏 나는 두 번의 이별을 했다. 사실 이별의 순간이라야 셀 수 없으리만치 숱했겠지만, 생각할 때마다 눈물 나게 하고 후회를 거듭하게 만들고 자책하고 반성하게 하는 가슴 먹먹한 이별을 경험한 건 두 번이었다. 두 이별의 공통점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별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은 절박한 마음이 시시때때로 올라온다.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 새로운 생각의 세계로 걸어가게 만드는 것도 꼭 같다.


첫 번째 이별은 스물 초반이었다. "너는 혼자가 어울리는 사람이야"라는 말에 나나 너나 절로 고개를 끄덕여질 정도로 나는 연애에 관심이 없었다. 나 혼자서 좋아하던 사람이야 한둘이 아니었지만 딱히 연애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낸 적은 없었다. 사실 난 연애가 뭔지도 몰랐다. 

그런 숙맥이 연애를 시작했다. 타인과 정서를 교류할 줄도, 감정을 표현하기는 커녕 느낄 줄도 몰랐던 나는 당연한 결말처럼 머잖아 이별을 맞았다. 그냥 "안녕" "그래 안녕"하고 마는 게 이별일 줄 알았었다. 막상 닥치니 생각도 못했던 일련의 감정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한동안 먹지도 잠을 자지도 일상생활도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심리상담을 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진리였다. 성장통이 지나고 어느새 나의 마음에도 평안이 찾아왔다. 그 끝에서 나는 생각했다.

"잃어버리지 않고도 그 소중함을 알 수 있다면. 이제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최선을 다 했다. 그래서인가, 그 이후엔 어떤 이별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남길 미련이 없으니 돌아서면 까맣게 아주 새까맣게 잊혀졌다. 마침내 나는 그렇게나 되고 싶었던 잃어버리지 않고도 소중함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일까?

4년 전, 내가 여행을 중도 작파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할머니를 잃고 난 뒤 뒤늦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할머니 병세가 호전되는 대로 다시 출국할 예정이었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맛에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 길로 나는 타의로 그리고 자의로 한국에 발목이 묶였다. 그러는 사이 사이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면 나는 고향에 내려 갔고 간호를 자처했다.

1년, 2년... 4년...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만 해도 혹시나 할머니를 잃을까 어쩔까 전전긍긍하던 나의 태도는 어느새 무덤덤하게 변해 있었다. 할머니는 몸 상태가 안 좋다가도 끝내 병세를 이겨내고 다시 기운을 차리곤 했다. 강한 분이었다. 그게 반복되는 사이 내 마음은 안일해졌다. 어쩌면 할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아예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밥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숨을  쉬지도 못했다. 준비   이별 앞에서 나는 또다시 후폭풍에 휩싸이며 헤매고 . 아니 어쩌면 나는 이전부터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별이 어떤 모습으로 닥칠지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간 많은 걸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성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십여 년이 지나도록 나는 한치도 자라지 못하고 말았다.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가?


인제 나는 모르겠다.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는  알았는데,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항상 최선을 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를 통해 배웠다한들 새로운 상황에선 새로운 처신이 필요한 법이다. 어쩌면  그대로 인간은 후회를 피할  없는 존재에 불과할까. 결국 인간이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존재란 말인가.  번째 이별을 치르고  가지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번째 이별 앞에선 다시 속수무책이 되었다.


할머니를 잃은 지 석 달이 다 되어간다. 역시나 시간은 약인지라 이제는 먹을 수도 잘 수도 숨을 쉴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잃어버리지 않고도 소중함을 알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는가, 아니면 끝끝내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결국 후회와 슬픔은 죽을 때까지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젠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첫번째 이별이 그러하였듯 이별은 숙제를 남긴다.  번째 맞은 이별 뒤에선  다른 성장통을 겪어 내야 하는건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걸리지 모르지만 그걸 지나왔다 해서 나는 달라질  있을까. 과연 그럴  있을까. 깜깜하기만 하다.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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