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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Jun 08. 2019

우리 동네 놀이터에 누군가가 산다

그네를 타다가

연하남과 데이트를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피부과 시술? 밥 사줄 돈? 인형 선물에 감동해주는 연기력? 나는 체력과 운동화라고 말하고 싶다. 어린 남자를 만나면 무조건 많이 걷게 된다. 헤어지기는 아쉬운데 카페는 안 가고 동네를 빙빙빙 도는데 스무 살 시절 연애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나도 어찌어찌 빙빙빙 함께 돌게 된다. 그러다가 발견('발굴'이 맞는다. 눈에 불을 켜고 앉아갈 곳을 찾아낼 수밖에 없었으니까)한 곳이 동네 놀이터였다.


지금은 쫑난,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장소다. 우리 동네에 이런 보물같은 스팟이 있었다니!  놀이터에서 애들을  번도 보지 못했다. 거친 숨을 뱉으며 턱걸이를 하는 젊은 남자, 줄넘기 몇십  휙휙 넘겼을 뿐인데 만면에 뿌듯함을 띠며 들어가는 여고생, 벤치 앉아 노상까는 무리들, 데이트 하는 연인, 그리고 어슬렁거리는 점박이 고양이가 있다. 이놈은 놀이터 데이트를  때마다 감시하듯 나타나 슬쩍 쳐다보고 이내 다른 곳으로 사라지곤 한다. 길고양이지만 밥을 챙겨주는 누군가가 있는 듯하다. 그래서 선뜻 이름붙여   없다.


새벽 한 두시쯤 집 들어가기 아쉬운 이들이 모이는 곳. 동네 놀이터다. 젊은이들의 경로당 같은 역할을 한달까. 성인들이 많이 모이는 놀이터이지만 그렇다고 밤에 으슥하지도 않다. 바로 앞 편의점에 불이 항상 켜져 있고 가로등도 밝아 혼자 산책하기에도 나쁘지 않다.


나는 회식 끝난 밤 우유 하나를 사들고 이곳 그네에 걸터앉곤 한다. 흔들흔들거리며 멍 때리다 보면 내가 취해서 흔들리는 건지, 그네가 흔들리는 건지 헷갈려지는데 그 과정에서 술이 좀 깬다. 그네 맞은편엔 정자 하나가 있는데 나는 이 정자에 반쯤 걸터앉다가 그대로 누워 밤공기 마시길 좋아한다.


날 풀린 어느 밤 그네를 타다 보니 정자 위에 이불로 둘둘 싸놓은 무언가가 보였다. 아무리 봐도 움직이지 않고 대형 폐기물처럼 버려진 느낌이었다. 가까이 갔더니 사람 형체였다. 그는 누에고치처럼 이불 안에 돌돌 싸인 채 꼼짝않고 있었다.  


새벽 한 두 시쯤 집 들어가기 아쉬운 이들이 모이는 동네 놀이터. 낮의 얼굴은 사뭇 다르다.  우리 동네 놀이터에는 정물이 되어버린 아저씨가 있다.


어쩌다 보니 그 주에 거의 매일 놀이터에 들렀는데 그는 항상 놀이터 정자 위에 옆으로 누워 미동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도 위협하지도 않고 말이다. 대체 그가 언제쯤 움직이는지, 나는 그네 위에서 노려봤지만 내 눈만 아팠다. 그가 가만히 있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정말로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정말 몰랐을 수도 있고. 연인들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놀이터에서 키스를 했고 어떤 사람들은 고성을 지르며 2차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그가 죽어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낮에 놀이터를 잠깐 들렀다. 정자 위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동네 사람 몇몇이 앉아 과일을 깎아먹고 있었다. 그는 낮에는 동네 어딘가를 배회하다가 늦은 밤 놀이터로 귀가해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는 저 사람의 거처구나. 밤과는 사뭇 다른 놀이터를 보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어젯밤엔 친구와 함께 놀이터에 들렀다. 둘이 맥주 한 잔 하고 신나서 벤치에 앉아 수다를 마저 떨었다. 친구의 데시벨이 조금 올라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쉿!" 했다. "여긴 저 아저씨 집이잖아." 친구는 황당해했다. "여기서 자는 저 아저씨가 잘못이니? 아님 내가 조금 떠든 게 잘못이니?" "응 네가 잘못이야"

 

내가 왜 그렇게까지 말했는지 모르겠다. 공공장소를 개인 공간인 양 차지하고 있는 저 아저씨. 평소의 나라면 도끼눈을 하고 쳐다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아저씨의 공간을 존중해주고 싶어진다. 동정심은 확실히 아니다.


우리 동네 놀이터에는 정물이 되어버린 아저씨가 있다. 적어도 여름밤까지는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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