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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May 31. 2019

나의 동네 친구 만들기

기술이 사람을 엮는다

합정과 망원 사이에 1년 반을 살면서 망원동이란 동네를 몰랐다. 그저 잡지에 나올만한, 힙한 카페와 음식점이 즐비한 동네로 알고 있었다. 요즘 나의 가장 큰 낙은 망원동에 놀러 가서 맛있는 밥 먹고, 주말을 마무리하는 밤에 양화대교에서 성산쪽으로 달리는 것이다. "달리기는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했던가. 기분이 울적한 날엔 어김없이 달리고 들어왔다.


그날도 망원시장을 가로질러 달리고 들어오던 길이었다. 문득 생각했다. '누군가 같이 뛰었으면 좋겠다!'. 만약 같이 뛰는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면 굳이 사람들과 함께 뛰려고 멀리까지 오진 않을 것이다. 그저 서너 명 정도 모여서 동네에서 출발해 뛰는 모임을 상상했다. 한바탕 뛰고 나면 잡생각이 정리됨과 동시에 엉뚱한 일을 벌이고 싶어진다. 그리하여 나의 '동네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어느 날 문득 한강을 달리다 생각했다. 같이 뛸 동네 친구가 필요해!


그날 밤 당장 페이스북 그룹 '망원동 좋아요'에 들어갔다. 소소한 동네 얘기나 가게 홍보가 올라오는 페이지인데 망원에 살기 훨씬 전부터 팔로잉을 하며 눈팅을 즐겼었다. 마침 동네 모임의 신입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나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링크를 타고 들어갔다. 이 동네에서 꽤 역사가 있는 모임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나절 만에 "죄송하지만 모임 성향이 저랑은 맞지 않아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도망치듯 채팅방을 나왔다. 그 그룹은 자기소개를 3일 이내로 올려야 강퇴당하지 않는데, 거기엔 일정한 양식이 있었다. 나이와 직장, 성별을 밝히고 한 달에 최소 2번은 참석해야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 커뮤니티를 오랫동안 가꿔온 이들 입장에선 당연한 조건이었을 테지만 나에겐 맞지 않았다. 더불어 반나절간 있던 카톡방에선 남녀간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난 그저 자유롭고 느슨한 모임이 필요했다.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과 술먹고 밥먹고 '친목 도모'만 하는 것도 왠지 무서웠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취향의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그건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아니야! 그럼 내가 한 번 만들어보지 뭐. 그래서 나는 용기내 글을 올렸다.


 "달리기의 치유 효과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달립니다. 러닝 전이나 후에 이야기 나누는 시간 있어요. 망원과 합정 기반으로 활동합니다. 금or토or일 저녁 양화대교 인근서 만나요. 그 주 장소와 시간은 목요일 오후에 공지합니다. 자유롭고 느슨한 모임이지만 혐오발언, 차별적 언행에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합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조건대로 모임을 꾸릴 수 있을 알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도록(!!!) 아무도 가입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나는 이내 깨달았다. 사람들은 주제가 있는 모임, 제약이 많은 모임을 부담스러워한다. 내가 그 규약이 싫어서 나왔으면서 너무 조건들을 많이 걸었다. 애초에 내가 모임을 연다고 해서 내 구미에 맞는 사람들만 모이는 게 아닌데, 어떤 새로운 만남이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데 그걸 간과했다.


두 번의 실패 후 한동안 있는 친구에게나 잘 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플랫폼을 알게 됐다. 동네 친구들을 이어주는 서비스인데, 가입하려면 집 주소가 나온 택배 송장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야 한다. 하루의 승인 기간이 지나 가입이 됐다.


여전히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과는 친구가 되면 안 된다는 걸 금과옥조로 여기던 나였다. 때마침 읽었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지금은 동거인이 된 저자 둘은 처음에 트위터 친구였다!-가 아니었다면 끝내 심리적 거부감을 못 버렸을 것이다.


가입을 하고도 한참을 망설이다 '편맥(편의점 맥주) 마시기' 모임에 나갔다. 늦은 밤 동네 편의점서 말그대로 맥주 한 잔 같이 하는 작은 모임이었다. 아이디어가 재밌었다. 어쩌면 내가 간절하게 찾았던 동네 친구 모습이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집으로 가다가 맥주 한 잔은 걸치고 싶고 하지만 혼자먹긴 싫고 그렇다고 멀리가긴 싫고 "잠깐 나와"라고 해서 불러낼 친구. 그렇게 만난 동네 친구 중에 실제로 옆집에 살고 있단 사실을 서로 뒤늦게 알게 됐다는 얘기는 벌써 이 동네 핫한 전설이 됐다.


'동친(동네 친구)'을 처음 만난 날 집으로 들어가면서 찰칵. 전보다 동네가 더 사랑스럽고 안전하게 느껴진다.


그 모임 이후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술이 사람을 엮는다는 말을. 실제로 만난 사람들 하고만 페이스북 친구를 맺을 만큼 나는 폐쇄적이고, 관계의 실재성을 맹신하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미 우리가 다들 인터넷으로 촘촘히 엮여있는데 이를 배제한 관계야말로 상상에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아무리 절친이어도 카카오톡 없으면 연락도 못하는 세상이다. 나는 그날 나의 공고한 벽 하나를 허물었다. 이런 재미로 서른까지 살아보는 것인가.


그날 밤 나는 새로운 동네 맛집들을 알게 됐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다양하고 재밌는 사람이 살고 있단걸 알게 되면서 이곳이 더 좋아졌다. 전에 비해 동네가 더 안전하다고도 느낀다. 비록 런닝 모임을 끝내 만들진 못했지만-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다-그날 이후 나의 '동네 라이프'는 매우 즐겁고 다채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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