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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Nov 11. 2019

동네 데이트가 이별 후 남기는 것들

어떤 공간은 망각이 필요하다

스물 여섯 어느 여름날, 어른이 되어간다고 느꼈다. 당시 사랑하던 이와 헤어지고 나서 묵묵히 일터에 나와 밥벌이를 하는 내 모습이 제법 어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내 회사 화장실 문 닫고 한바탕 눈물 쏙 빼는 날 보며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이별 후 일상으로의 복귀까지 시간을 지켜보며 얼마나 어른이 되었는지 가늠해본다. 최대한 일상을 똑같이 유지하고 티내지 않는다. 시간이 알아서 감정의 불씨를 꺼뜨리도록 나는 나의 삶을 산다. 회한 따위에 묻혀 있기에 생이 너무 짧다는 걸 알아버렸다.     


담담한 내 모습에 놀라면서도 초연해지지 않는 순간들이 예고 없이 찾아와 마음을 헤집는다. 사랑에 실패했다는 수치심을 벗지 못해, 주변에는 입을 닫는다. 아무렇지 않다고, 푸닥거리 같은 거 청승맞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동네에 애정을 갖게 된 계기는 그가 내 일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 생활 반경 안에 누군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함께 ‘맛있다!’를 연발하고 홀로 귀가하던 길에 바래다주는 사람이 생기면서 동네 곳곳에 의미가 생겼다. 평범한 길목도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랑스런 공간이 됐다.  


그러나 이게 다 내 빚으로 돌아올 줄이야! 그 풍경에서 누군가가 사라지는 순간 나의 평화로웠던 공간들은 나를 매우 괴롭게 한다. 예전에도 거기 나 혼자 있었는데 그리고 지금도 혼자인데, 그 사이 누가 잠시 앉았다 갔을 뿐인데 예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글쓰기 좋은 술집을 하나 발견했다. 함께 있던 공간들에 새로운 기억을 입힌다. 나를 일으키는 구체적 방법들을 알고 실천할 때마다 많이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


나는 어려움이 있을 때 차라리 들여다보는 류의 인간이다. 제주도에서 헤어지고 나서 발이 닳도록 제주도에 다닌 적이 있다. 제주도가 싫어지는 게 싫어서. 일종의 ‘노출 요법’이랄까. 뻔질나게 드나들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머릿속 연관검색어에서 그가 사라졌다. 제주도에 추억을 하나씩 묻고 올 때마다 조금씩 괜찮아졌다.


사람마다 기억에 저항하는 방법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회피 요법’을 쓰기도 한다. 괜찮아질 때까지 잠시 관망하며 떨어져 있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동네 데이트를 즐겼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별별 기억들에 강제 소환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억들을 좀 더 먼 곳에 묻어놓을걸 그랬다. 함께 가던 식당 안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자주 가던 맛집에 발을 들이기가 망설여진다. 맥주 한 잔 하러 나갔다가 어느 곳 하나 기억이 끈덕지지 않은 곳이 없어 동네를 빙빙 돈다. 애정을 쏟았던 장소 곳곳이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고양이 털’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직면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새로운 기억들을 동네 곳곳에 조금씩 숨겨놓기로 한다. 스친 맛집도 다시보자. 자주 가던 식당에서 새 메뉴를 시켜보고, 매번 지나다녔지만 안 가본 식당에 도전해본다.   

  

같이 걷던 길목에 있던 요가원을 끊었다. 요가 후 상쾌한 기분으로 길을 걸어 나오는 경험이 쌓이면 그냥 ‘요가원 가는 길’이 되겠지. 사랑을 잃었다고 이 동네에 대한 애정까지 버릴 수는 없으니까. 나의 일상을 탈환해야 하니까, 집 앞을 나서는 용기를 놓을 수 없다.


문득 어른이 된다는 건,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나를 일으키는 구체적 방법들을 담대하게 실천해보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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