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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Oct 21. 2019

걷기 좋은 동네가 사랑스럽다

불청객이 된 배달의 기수들

기분 좋게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순간 "부아아앙"하는 굉음과 함게 내 옆을 오토바이 한 대가 스치고 지나갔다. 인도(人道)였다. 뒤에서 오다가 방향을 휙 꺾어 나를 제치고 벌써 저만큼 가버렸다. 2~3초 후에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채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오토바이는 집 앞 피씨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 시간이 채 10초가 안 됐다. 배달 대행 기사인 듯 했다. '아니, 지나가다 애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내 인도의 무법자를 반드시 처단하리!'


나는 음식을 배달하고 나오는 오토바이를 기다렸다. 역시 그는 인도와 차도의 구분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듯 인도 위 사람들을 요리조리 비집고 빠져나갔다. 휴대폰을 켰지만 영상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차 번호만 재빠르게 메모했다.


집에 온 나는 경찰청의 '목격자를 찾습니다' 앱을 깔았다. 영상을 찍지는 못했지만 발생 시각과 정황, 차 번호를 상세히 적어 교통 법규 위반 신고를 했다. 기사와 업주에게 경고 차원에서 범칙금을 꼭 물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 하는 것이 '회원가입'과 '로그인'이다. 오밤중에 이 성가신 일을 하면서 시인 김수영의 시구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가 떠올랐다. 배달 기사들 노동 조건이 너무 열악해서는 아닌가, 의구심도 들었다. 이내 '아니지,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데 이게 왜 사소한가. 생계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협해도 되는가' 하는 내면의 소리가 귀찮음과 일말의 죄책감을 눌렀다.


즐기는 데이트 코스 중 하나가 동네를 빙빙 도는 것인데 언제부턴가 동네 걷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는 이 급증한 오토바이들 때문이고, 둘째는 따릉이와 전동 킥보드 때문이다.


인도 위에서, 골목에서 이 '탈것'들을 맞닥뜨리면 몸을 길가로 바싹 붙인다. 그들 입장에선 내가 알짱거리는 장애물 정도로 인식되겠지만 뚜벅이인 나로선 졸지에 평화로운 걷기 시간을 강탈 당하는 기분이다.


안전하게 걷지 못하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가. 도시의 사랑스러운 면모를 떠올리면 항상 보행 친화적인 동네를 거닌 기억이 겹친다. 2014년 일본 교토 '철학의 길'을 걸으면서 교토라는 도시 자체에 푹 빠졌다. 걷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길이 있다는 사실은 이듬해 다시 그 도시를 찾은 아주 강력한 이유가 됐다.


일본 교토 '철학의 길'을 걷다보니 호젓한 동네로 이어졌다. 사랑스러운 도시의 기본 조건은 '걷기 좋은 동네가 있는가'이다.


지난 6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출장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암스테르담 도심에서는 좀처럼 자동차를 보기 어려웠다. 인구보다 자전거가 많은 도시답게 모든 길에 자전거 도로가 나 있었고, 때문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많아도 인도를 침범하는 이는 없었다.


한 번 서울 공덕동에서 연남동까지 따릉이를 타고 온 적이 있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니 마른 국수 가락처럼 길이 뚝뚝 끊겼다. 차도로 가자니 뒤에서 빵빵거리는 차들, 길가에 차를 대려는 택시들이 위협적이었고 인도로 가자니 내가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인구 1000만이 바글바글 부대끼고 사는 서울에서 걷기 좋은 동네 찾기란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바퀴 달린 것보다 걷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인식 정도는 상식이 돼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 내가 신고한 건에 대한 답변을 받았다. 서울 마포경찰서에서는 "신고한 차량의 영상을 확인한 결과 위반 사실은 확인되었으나, 과태료 처분은 하지 않고 운전자에 대해 계도조치했다"고 했다. 사진 한 장으로 과태료 처분까지는 어렵다는 소리였다.


역시 가뿐한 마음으로 동네 걷기는 글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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