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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손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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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Jun 24. 2022

2022.06.20, 손 풀기

붙어 있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허공을 바라본다. 허공엔 외줄 하나가 놓여 있다. 외줄에는 옷걸이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개. 옷걸이는 죄다 기괴하게 휘어져 있었다. 아마 걸지 말아야 할 것들을 걸었던 흔적일 거다. 걸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걸지 않는 그것을 한때는 일곱 번이나 걸었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니 손바닥이 짜릿하다. 이렇게라도 풀어내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외줄에 올라선 건 어느 새벽이었다. 안개는 어깨에 내려앉았다. 코 끝에도, 속눈썹 위에도. 어두운 건 싫어, 너는 불을 끄지 않았지. 어두운 방에는 플레이리스트가 흐르고 있어. 플레이리스트의 이름은 lonely mood. 가끔은 이런 시간도 필요한 거잖아, 그렇지?


외줄은 이쪽과 저쪽에 걸려있건만 그림은 끊어진 선처럼 점과 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면을 칠할 수 없는 것은 붓이 망가졌기 때문이겠지. 정성스럽게도 날 버려준 것은 지난 시간이었어. 시간은 둥글게 돌아 나에게 왔다. 분열적인 말들과 혼란스러운 그림과 흐린 날씨와 뾰족한 생각들은 빈 종이 위에 펼쳐졌다. 돌아온 시간을 바라보며 종이를 허공에 들어 보였다. 햇빛이 종이 뒤로 비쳤다. 눈이 부시지 않았다. 종이 냄새가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다. 어디선가 나는 빵 굽는 냄새뿐. 예열되지 않은 오븐은 아직 열 수가 없었고, 예열은 아마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다.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두려움을 접어버린 나는 까치발을 들어 보였다. 제법 발이 뻐근하다. 오늘 옷걸이에 걸려도 좋아. 채 마르지 않은 빨래처럼 눅눅한 기분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니? 아니, 아무것도.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고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꾹꾹 밀어 넣은 숨을 나는 영영 내뱉지 못할까 봐 또다시 두려워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지. '죽음이 그토록 가볍다면 삶이 이토록 무거울 이유도 없었어요.' 삶은 무겁지 않다. 아니, 오히려 텅 비어버린 것에 가깝지. 이 세계가 끝나고 나면 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세계는 멈추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걷다가 멈춰버린다. 아니, 멈춰진다. 쓰러진 너는 요란한 소리로 멈췄겠지. 세계의 끝은 거기에 있었다. 요란하게 달리는 소리 그 사이에.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비틀거리는 나를 움켜쥔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던 길을 갔다. 알아, 나는 널 믿어. 터져 나오던 솜들이 다시 재봉됐다. 흉터는 남았다. 흉터 위엔 별똥별이 새겨졌다. 때로는 별똥별을 끊어버리고 싶어. 그렇지만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연기는 외줄이 되었다. 곧 사라져 버릴 외줄이.  


아직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았어. 아니,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남아있는 흔적들이겠지. 끝없이 땅굴을 파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담배를 한대 태우러 가려던 참이다. 담배를 태우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참 바쁘게도 움직였다. 뻔하고 냉정한 말들이 쏟아졌다. 쏟아져버린 말들 앞에서 나는 힘없이 무너졌다. 너랑 같이 듣고 싶은 노래가 생겼어. 들켜버린 마음을 나는 다시 주워 담았다. 정성스럽게도 버려지고 쏟아져버리고 들켜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비우고 담고 또다시 쏟아버리고 글러먹은 시간 앞에서 간판이 켜졌다. 배설된 것들이 환하게 비쳤다. 눈앞이 선명해지고 오직 혼자라는 것이 온몸을 쭈뼛거리게 했다.


어색한 표정과 인사는 길지 않았다. 스며들어버린 너와 나는 서로를 잡아먹고 집어삼켰다. 손바닥에 열감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인가 보다. 세계는 이제 곧 끝이 난다.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거다. 재봉되지 않은 자국을 바라보며 이곳에 여전히 있을 거다. 땅을 바라보며. 때로는 하늘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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