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상을 살아가며
수술과 항암에 대한 내용으로 써 보려던 글은 투병생활 중의 일상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인생에 두 번 다시없을 너무 큰 불행이라 여겼던 병과 그것을 치료하는 과정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큰 불행일 것도 없고 그래서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
매일 자기 계발서적들을 찾아 읽던 때가 있었다. '남들처럼' 잘 살고 싶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보려 한 것이었다. 문학대신 자기 계발서를 읽고 새벽의 감성에 젖는 대신 일찍 일어나 하루의 해야 할 것들을 떠올렸다. 직장에서는 이런 태도가 도움이 됐다. 체계적으로 일을 정리할 수 있었고 실수도 많이 줄었다. 스스로 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것도 큰 수확이었다. 딱 거기서 나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정도였다면 충분했을 텐데 점점 욕심이 생겼다.
'남들처럼' 더 빨리 성공하고 싶었고 얼른 따라잡고 싶었다. 내가 설정한 목표들을 빨리 이루고 싶었고 점점 나에 대한 의심과 재촉이 시작됐다.
원래도 예민하고 불안도가 높았는데 나 자신에 대한 의심과 재촉은 조급증과 불안을 더 키웠다. 방해받지 않으려고 세상과 경계를 짓고 담을 쌓았다. 빨리, 효율적으로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럴수록 '고쳐야 하는' 내 모습은 더 자주 눈에 띄었다. 나는 왜 이렇게 느릴까. 나는 왜 이렇게 잡생각이 많을까. 하나하나 못난 것만 마음에 박혔다.
어느 순간, 일을 하지 않는 나는, 목표를 향해 달리지 않는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휴식의 순간에도 긴장으로 경직된 몸은 풀리지 않았고 편히 쉴 수 없어 또 자기 계발서를 읽었다. 나는 '쉰다'라고 생각한 순간도 돌아보면 마음 편히 쉰 적이 드물었다. 내 뇌는 스위치를 끌 줄 몰랐고 계속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멍 때리기를 좋아하고 상상하기를 좋아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하는 걸 좋아했던 나는, 어느 순간 그런 나를 싫어했다. 그런 건 '남들처럼' 살기 어렵게 만드는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병에 걸리고 난 후, 강제로 쉬게 되자 날 도와준 건 내가 싫어하고 어떻게든 멀리하고 싶었던 바로 그 특성들이었다.
마음껏 멍 때리며 하늘을 보고, 하고 싶은 걸 실컷 상상해 보고,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으며 그 속에서 나와 같은 마음을 발견하는 시간. 그 시간들이 내 몸을 점점 회복시켰다.
한동안 투자에 열을 올렸던 시기가 있었다. 주식이 뭔지도, 부동산 투자가 뭔지도 모르면서 뒤처지기 싫어서 조급하게 뛰어들었고 당연히 성과도 좋지 않았다. '남들처럼'의 기준을 벗어나 나를 돌아보니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을 따라잡으려 했을까 싶다. 뭐가 그렇게 조급했을까. 그땐 내가 왜 그렇게 못나 보였을까.
누군가의 기준을 따르기보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 우선이라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건강을 잃어보고 나서야 몸의 소중함을 알았듯, 마구 휘둘리고 나서야 내 중심이 우선이라는 걸 알았다. 병은 몸의 소중함을 알게 할 뿐 아니라 내 삶의 군더더기들도 함께 휩쓸어갔다. 병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가는 동안 삶은 오히려 가벼워진다.
요즘의 내 일상은 한없이 단조롭고 차분하다. 그 속에서 나는 고요하게 나를 돌아보고 내 중심을 다시 세워본다. 조금은 더 단단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