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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Nov 24. 2023

나의 난소생존기(14)

중간점검

세 번의 항암을 마친 후, 중간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혼자 가는 나를 염려하여 굳이 데려다주겠다는 엄마와 아빠를 말렸다. 요즘의 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다. 본가에서 지내는 동안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편안하게 요양할 수 있었던 것은 좋았지만, 오롯이 혼자가 될 시간은 절대적으로 줄었다.


내가 사람들을 배척하고 멀리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원래 이런 사람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혼자인 시간이 필요한 사람.


ktx와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마치 기차 여행이라도 하는 듯 약간 들떴다. 기차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쓸쓸함을, 익숙한 외로움을 느꼈다. 병원에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괜히 병원 곳곳을 둘러보기도 하고,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1시 40분. 내 검사 시간이 다가올수록 약간 불안해졌다. 혹시 암이 다른 곳에 전이되지는 않았을지, 항암이 전혀 소용없는 것은 아닐지 여러 가지 가정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하지만 온몸이 불안에 잠식되는 수준은 아니었고, 이 정도 불안은 혼자 감내하는 것이 더 편했다. 애써 나를 위로하려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검사복으로 갈아입고 조영제 투여를 위한 주삿바늘을 꽂자, 다시 환자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났다. 환자복만큼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옷도 없을 것이다. 약 7시간 정도를 금식한 탓인지 조영제 투여 후 속이 메스꺼웠다. 원래 조영제 부작용 같은 것을 잘 느끼지 못했고 별 반응이 없었는데 아마 몸이 좀 약해진 듯했다. 검사는 20분 만에 끝났다. 두 시간을 이동한 것 치고는 허무할 정도로 빨리 끝나버렸다.


나는 다시 본가로 향했다. 돌아가는 ktx에서는 설레지 않았다. 사실 조금 울었다.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웠다. 나를 위로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는 애써 힘을 내야 할 것 같아서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그 눈물이 마음껏 외로울 자유를 얻고 나자, 그제야 편안하게 흘렀다.


사실 가발은 불편하다. 사람들이 진짜 자연스럽다고, 감쪽같다고 해줘도 가발은 불편하다. 외출할 때마다 두꺼운 털모자를 뒤집어써야 하는 기분이다. 그것도 위치와 방향을 잘 맞추어 써 주어야만 하는 까다로운 모자. 게다가 땀 흡수가 안 돼서 정말 덥다.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여도 내 것이 아닌 것은 어쩔 수 없다. 암환자가 된다는 건 이런 불편을 당연하게 감수해야 하는 일과도 같다.


내가 원치 않아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검사를 거쳐야 하고, 가발을 써야 하고, 자주 치미는 불안을 감내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 정도면 감사한 일이야.'


이런 말들로 타협하고 만족하게 된다. 때로 조금은 일상의 군더더기들이 해소된 듯 개운한 기분을 느끼는 날도 있고 이런 배움을 얻었다는 것에 감사하다가도 과거의 내 삶이 무의미해지는 건 아닌가 막연히 두려워지기도 한다.


사는 건 어렵다. 암에 걸렸다고 해서 삶의 난이도가 훨씬 올라갈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아니다. 다소 불편해질 뿐이다. 그렇다고 쉬워지지도 않지만 분명한 건,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많이 변한다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단순해진달까.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수준은 아니다. 내가 가졌던 관념, 습관들은 여전히 남아서 가끔은 나를 불안하게 뒤흔든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충분한 걸까. 여기에 익숙해져도 괜찮은 걸까. 혼자가 된 나는 기차 안에서 마음껏 온갖 걱정에 휩싸이고, 무너지고, 흔들린다. 두 시간 동안 조용히 울었다. 본가에 도착할 즈음, 다시 나를 다잡을 수 있었다. 고맙게도 여전히 흔들림 없이 용기를 주는 장소로 돌아간다. 그제야 진심으로 감사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삶은 아주 조금 더 단순해졌다.


앞으로도 힘내기 싫은 날은 그냥 마음껏 무너지기로 했다. 그 시간이 나를 더 단단하게 해 줄 테니까.

대부분의 시간은 힘을 내고 용기를 내고 일상을 살아가되, 애써야 하면 그냥 여한 없이 흔들리고 울어버리자. 그게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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