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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Sep 21. 2024

이상한 투병기

프롤로그

내가 암 진단을 받은 것은 ‘이 정도면 나도 이제 평범하게 살 수 있나?’라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직장생활 한 지 십 년이 좀 넘은 때였다. 나름 잘 적응했고, 일하는데 자신감도 붙었다. 물론 본가의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래도. 나 혼자 내 몸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으니 이 정도가 어딘가.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2024년 상반기. 나는 세 번의 전신마취를 했다. 첫 시작은 복막염이었다. 며칠째 아랫배가 아파 혹시나 해서 제 발로 찾아간 병원에서 복막염을 진단받았다. 이 상태로 제 발로 걸어왔다는 것에 의사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그날 저녁, 수술대에 누웠다. 그전에 이미 부인과 검진으로 왼쪽 난소에 큰 혹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삼 개월 후, 난소의 혹을 떼어내기로 되어 있었다. 첫 수술 후, 예정대로 난소의 혹을 떼어내기 위해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집도의는 수술을 중단했다. 복막염 수술 후 장기유착이 너무 심해 복강경 수술로는 불가능하다며 전문 외과의가 있는 대학병원에서 수술받을 것을 권했다.      


두 번째 수술이 실패한 후, 나는 상황이 점점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근거 없는 낙관으로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대학병원에서는 수술 전 다시 재검사를 실시했고, 담당 의사는 난소의 혹이 크기가 매우 큰 상태로 최대한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장기유착이 워낙 심했기에 개복수술을 결정했다.      


이미 두 차례, 수술대 위에 누워봤지만 세 번째 수술을 앞둔 나는 더 많이 긴장했다. 차곡차곡 최악의 상황을 향해 밀려가는 컨베이어벨트 위에 있는 기분. ‘아닐 거야.’라는 말이 더는 먹혀들지 않는 상황이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기엔 수술받는 환자도 할 일이 많았다. 우선 직장에 전화했다. 2개월의 병가를 신청했다. 괜찮을 거라고,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위로를 받았고, 나도 웃으며 응대했다. 두려운 만큼 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수술 전날, 2L의 관장액을 마시며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게 피날레였다. 이걸 100ml라도 더 마실 바엔 수술을 한 번 더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게 새벽에야 겨우 화장실 가는 것을 멈추고 잠이 들었다. 첫 수술 시간에 예약되어 깨자마자 수술실로 실려갔다. 벌써 세 번째 전신마취. 이렇게 단기간에 세 번의 전신마취를 해도 되는 걸까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병실이었다.  

    

 “지금부터 네 시간 동안 잠드시면 안 돼요. 보호자께서 계속 깨워주세요.”    

 

전신 마취 후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깊은 호흡을 내쉬며 마취 가스를 내보내는 게 중요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깨어 있으려 노력했다. 잠들려고 하면 옆에 있던 엄마가 흔들어 깨웠다.     

 

“엄마, 내장이 흔들리는 것 같아. 흔들지 말고 말을 걸어 줘.”

     

잠시 고민하던 엄마가 말했다.     


 “미안한데 할 말이 없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엄마 다운 대답이었다. 다정하지 않지만 굳건한 여성. 다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딸인 내게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딸린 식구들을 먹여 살린 강단 있는 사람.      


일주일 후,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난소의 혹은 경계성 종양이었다. 워낙 크기가 크고 오래되어 종양 안에 있던 암세포가 복강 쪽으로 전이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미세 전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저등급 장액성 난소암 환자가 되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고 드디어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왔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오래도록 외면했던 것들과 비로소 마주하게 됐다. 강제로. 암은 오래도록 회피해 온 가족과의 관계를,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직면하게 했다.   

   

‘비로소’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비로소 무엇에 이르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비로소, 암을 치유하는 동안 나는 나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이건 그 치유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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