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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Sep 23. 2024

어느 날의 바다

 부산의 바다는 외지인을 위한 곳이다. 기별 없이 찾아가기는 어렵다. 부산의 바다 근처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이 많다. 건물이 즐비해 주차하기 어렵고 소란하다. 부산에서 바다를 '보려면' 근처 대형 카페를 찾는 것이 차라리 효율적이다.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고향인 포항의 바다가 그리웠던 것은 그 때문이다.


 고향 바다는 성수기인 여름을 제외하고는 인적이 드물다. 바다 근처에 온갖 가게들이 성행하는 곳은 영일대해수욕장뿐, 다른 곳들은 한산하다. 1차 항암을 마치고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본가 근처의 월포해수욕장이었다. 9월 초였고 여전히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연습에 열중하고 있어 다른 것에 무신경했다. 


그때 나는 머리가 빠져 가발을 쓴 상태였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홀로 바닷바람을 맞았다. 종교도 없는데 기도했다. 제발 이 시기를 잘 지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모든 과정을 의연히 넘기는 척했지만, 머리가 빠지고 나자 그런 척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시간의 흐름을 믿는 수밖에. 


소란한 머릿속을 잠재우고 서핑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때론 파도를 타고 유연하게 뭍에 착지했고, 넘어지면 다음 파도를 기다리기도 했다. 다시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지는 날이 올까. 숨 쉬는 것만으로 체력이 소진되던 때였다. 나는 이 무력감이 오래 지속되어 무엇에도 열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때로 어떤 고통은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일상은 생각보다 훨씬 연약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어쩌면 인생이 이끄는 변화에 조금은 마음은 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적당한 학교를 가고, 적당한 직업을 가지면 삶이 그것을 기반으로 조금은 수월하게 흘러갈 거라 생각했다. 어떤 '안정적인 기반'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그러기에 나는 너무 여리고 세상은 험하니, 그 기반이라는 것이 방패가 되어주리라 생각했다. 


 암에 걸리고 나서야, 나는 그 생각이 전제부터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삶은 애초에 안정적일 수 없다. 아무리 세상이 말하는 '기반'이라는 것을 붙들고 그것에 뿌리를 내려도 삶은 어느 순간 그 기반을 뿌리째 뒤흔든다.


모든 항암 치료를 끝내고, 이직에 성공한 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갔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의 끝과 맞닿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후련하고 들뜬 기분으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친구는 외국계기업, 스타트업으로의 이직을 감행하다 결국 대기업에 안착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이직'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망하지 않을 법한 대기업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말이었다. 


 "야, 우리 아직은 삼십 대야. 대기업 이직보다 더 나은 게 올 수도 있어!"


친구는 맞는 말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수히 들었을 축하의 말 중 하나 정도로 받아들였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하고, 행동에 옮기는 동안 무수히 많은 것들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 모든 것들은 시들해진다. 외부의 요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 뿌리에 더는 양분을 쏟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열정적으로 원했던 것이 어느 순간 압도적으로 나은 선택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니 변하는 건 세상이라기보단 결국 나다. 영원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결국 내가 변할 테니까.


내가 마주친 무수히 많은 이들의 삶에 대해 상상해 본다. 나와 친구의 앞에 남은 생은 또 얼마나 될지. 그 생의 모든 변화를 미리 예측하는 것은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삼십 대는 겁이 많아진다. 주변은 빠르게 '정착'을 향해 가고 삶의 윤곽을 결정짓는다. 정착을 위해 변화를 감수했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큰 변화를 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변화의 과정에서 얻은 것은 정착 외의 모든 것이다. 성장과 인연, 후회와 갈망, 그리고 찰나의 맞닿음.


봄이 오기 직전의 겨울이었다. 제주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었고, 친구는 만족스럽게 커피를 마셨다. 이따금 창 밖을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고향 바다를 떠올렸다. 서핑하던 사람들. 그들의 움직임. 파도를 타고 넘어지고 다시 파도를 기다리던 그들. 문득 서핑의 아름다움은 고난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낀다. 넘어져도 일어나 끝내 성취하기 위함이 아니다. 끊임없이 파도를 타다 한 순간, 파도와 내가 한 몸이 되었을 때의 환희,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함이다. 그게 전부다. 환희를 맛보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파도에 익숙해진다. 


그들에게 고통은 고통 그 자체라거나 다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묵직한 것이 아니다. 문득 몇 달 전 내가 느낀 고통의 무게가 이미 꽤 가벼워졌다는 걸 느낀다. 그건 시간의 흐름이 나만 비껴가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든 감정은 옅어지고, 고통도 마찬가지다.


뿌리내릴 곳은 없다. 그래도 괜찮다. 사실 그게 삶을 대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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