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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Sep 29. 2024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작>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델리아 오언스가 일흔에 처음 쓴 소설이다. 주인공 카야는 늪지에서 방치된 채 혼자 산다. 그녀는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삶의 공간과는 동떨어진 곳에 살고 당연히 외롭다. 카야는 외로움을 채워주는 남자들과 만나고, 얽히고,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배신당하고, 배신한다. 매혹적인 이야기다. 일흔의 나이에 어떻게 이런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소설을 썼을까 싶어 델리아 오언스의 인터뷰를 찾아본 적이 있다. 그녀는 작품의 배경이 된 늪지를 탐구하는 생태학자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분명히 밝힌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카야는 사람들 사이 섞여들지 못한다. 고립되고 외롭고 치밀하다. 때로 사람들이 다가오지만 그때뿐, 대부분은 독특한 카야의 분위기에 끌렸다가 당연하다는 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인터뷰 기사를 읽은 후, 나는 가끔씩 카야를 떠올렸다. 그래서 카야는 결국 외로움을 해결했을까. 아니면 이미 잠식당한 걸까.

 

항암치료 시작 일주일 전, 먼저 그 과정을 겪어 본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병원에서 이야기해 주지 않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것들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겪지 않은 고통은 상상 속에서 더 커졌다. 단 한 가지 기억에 남는 말은 '딱 5일만 참아.'였다. 


되짚어보면 항암치료를 앞둔 동안은 평소보다 감정의 기복이 커진 상태였다. 두려움 직후 찾아온 엄청난 자유로움에 평화로웠다가도 순식간에 항암치료에 대한 생각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햇볕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금세 우울해졌다.


그리고 암에 걸리지 않은 '모든 사람'이 부러웠다. 순식간에 엄청난 고립감과 외로움이 찾아왔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 치료를 받아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의연하고 싶었지만 주삿바늘이 혈관에 꽂힐 때부터 이미 온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응원하기 위해 연락을 해왔고 정말 감사했다. 잠시 그 행복감에 사로잡혔다가 순식간에 훅 가라앉았다. 데미안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밝은 빛의 영역'에 포함된 사람들이고 난 아니다. 그들은 암에 걸리지 않았으니까. 먼저 항암치료를 겪어본 선배도 연락을 해왔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적어도 이 과정을 이미 마쳤으니까. 주삿바늘을 꽂은 채 가만히 누워 있는 그 시기의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혼자만의 섬에 나를 가둬버렸고 '빛의 영역'에 나갈 생각도 없었다. 그냥 차곡차곡 치밀하게, 외로움이 만들어낸 원망과 분노를 빈틈없이 쌓을 뿐이었다. 마치 카야처럼. 


이야기의 말미에서 카야는 살인죄로 용의 선상에 올라 재판을 받는다. 그녀가 만났던 남자가 미심쩍게 죽은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어 그녀는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그 남자를 죽인 것은 카야가 맞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곳의 생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자기만 아는 방식으로 그를 살해한다. 치밀한 복수다. 외로움과 분노가 켜켜이 쌓인 채 고립되면 누군가를 죽일 계획을 세울 수도 있구나. 그땐 그냥 넘겼던 감정이 이제는 내 것이 되어 병실에 내 공간만큼의 관짝을 만든다. 


암의 종류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약 8시간 정도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퇴원을 했다. 선배가 말했던 것처럼 딱 5일 정도 힘들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극심한 구토, 오심, 불면증은 없었다. 그냥 피로감이 평소보다 더 높은 정도였다. 자주 누워야 하고 입맛이 없었다. 다행히도 부작용이 거의 없는 편이었지만 정말 몸을 '유지' 하는 것 외에 쓸 에너지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켜켜이 쌓아둔 감정의 탑도 흐물거리며 무너졌다. 원망과 분노도 에너지가 있어야 느끼는 것이었다. 아무 잡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좀 슬프고 체력적으로 힘들다. 그리고 얼른 시간이 흐르길 바란다. 카야에게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줄 누군가의 사랑이 구원이었듯, 내게는 시간의 흐름이 구원이었다. 


순례길을 갔던 작년을 떠올렸다. 아주 멀게 느껴지는 길은 그냥 눈앞의 발걸음만 봐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그러다 보면 끝에 다다라있다. 정확히 말하면 끝이라기 보단 목표지점이고 그것 역시 과정이다. 그 모든 걸음을 생략하고 눈 감았다 뜨면 목표지점에 도착하는 마법 같은 건 없다.


해가 뜨면 옥상에 나가 햇볕을 쪼이고 다시 눕는다. 식사를 잘 챙겨 먹고 또 눕는다. 통증이 느껴지면 시간의 흐름을 믿는다. 괜찮아. 며칠 후면 괜찮아져. 어차피 시간은 흘러. 창 밖으로 달의 모양이 변하는 것을 매일 관찰한다.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조금씩 변해 달은 초승달에서 상현달을 지나 보름달로, 다시 그믐달이 된다. 마치 내 마음처럼 차올랐다 깎이길 반복하며 시간은 흐른다. 


내게만 특별히 시간이 멈추는 마법 같은 것은 없기에 정말로 시간은 흐르고, 몸은 훨씬 개운해져 있다. 늪지대에 고립된 카야가 되었던 날들은 이미 흐려졌고 스스로 쌓았던 감정들도 약에 무너졌다. 대신 달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좀 더 단단한 내가 남았다. 


남은 항암 회차를 곱씹어 보며 두려움이 훨씬 옅어진 걸 느꼈다. 나는 다시 카야가 되고 분노와 원망에 날 밀어 넣겠지만 그것 역시 밟아야 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은 비슷하게 흐르고, 지나고, 조금씩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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