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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Oct 12. 2024

깊게 숨 쉬는 순간

 복직을 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했던가. 암을 치유하는 동안 일상의 소중함이 더 크게 느껴졌고, 그만큼 일상에 대한 갈망도 컸다. 여기서 말하는 일상이란, 흔히 말하는 평범한 삶을 말한다. 눈 떠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뻗어 쉬는 삶. 그래서 1년 만에 복귀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나는 분명 일상에 감사함을 느끼며 수월하게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오만이었다.

 

 유독 운 없다고 여겨지는 날이 있다. 직장은 바빴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함께했다. 녹초가 된 채 CT 검사를 받으러 갔다. 유독 굵은 주삿바늘이 혈관으로 들어왔다. 그날따라 혈관통이 더 심했다. 검사받는 내내 통증을 꾹 참아야 했다. 오전 8시부터 굶은 상태였다. 진이 빠졌다.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심장께가 뻐근했다. 온갖 감정이 일렁이다 눈물이 났다. 왜 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는 이유를 찾을 힘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는 늘 바빴다. 가장의 역할을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가 번 돈으로 나는 밥을 먹고 교육을 받았다. 동생과 내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다. 슈퍼마켓에 가기 위해 엄마와 나, 동생이 함께 길을 나섰다. 동생과 나는 서로 엄마의 오른손을 잡겠다며 장난치듯 엄마 주위를 빙빙 돌았다. 엄마는 그런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땐 엄마 손잡는 걸 좋아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나이였다. 학년이 올라가고 일상은 더 힘들어지고 엄마와 아무것도 것도 나눌 것이 없어졌다. 나는 엄마의 삶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삶을 혼자 결정하는 것에 익숙해질수록 내게 엄마는 어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삶에 ‘엄마’는 더는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엄마 없이도 먹고살 수 있고, 중요한 일을 결정할 수 있으니까. 어차피 엄마와 깊은 속내를 나눠본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걸 그리워할 수도 있다. 나는 복직 후 진이 빠진 채 침대에 누워 엄마의 따뜻한 손길을 그리워했다. 괜찮아.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이런 흔해빠진 당연한 위로를 원했다. 엄마의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목소리에서 눈물의 흔적을 없앴다. 엄마는 일을 할만하냐, 밥은 잘 먹고 있냐고 물었고 나는 다 괜찮다고 했다. 수화기 사이로 침묵이 맴돌았다.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엄마의 말에 나는 별 일은 아니고 그냥 좀 일이 지친다고 했다. 내가 갈까. 엄마의 말에 나는 됐다며 쉬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와 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만큼이나 자존심이 세고, 혼자 우는 것보다 더 싫은 건 엄마 앞에서 우는 일이다.


 일주일 후,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다시 병원에 갔다. 다른 수치는 모두 정상이나, 갑상선에 작은 결절이 생겼다고 했다. 갑상선의 결절이야 워낙 흔하다지만, 한 번 암을 겪은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다른 수치가 정상이니 괜찮을 거라 믿고 의연한 척 갑상선 검사 예약을 하고 돌아왔다. 나는 결절을 핑계로 다시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나만큼 내 건강을 염려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을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침묵에도 우리는 꽤 오랜 시간 통화했다.


 그러다 결국, 끊임없이 갑상선에 생긴 결절의 정체를 걱정하는 엄마에게 “엄마가 그렇게 걱정하면 내가 더 불안하잖아!” 라며 난대 없이 짜증 내고야 말았다. 엄마는 잠시 침묵하다 그래. 알겠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역시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다 문득, 그럼에도 그녀와의 통화 이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걸 알았다.

 

 어색한 것을 마주하면 긴장한다. 뒷목부터 굳어진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숨이 얕아진다. 6살 무렵, 엄마 아빠가 나를 어린이 연극 공연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내 또래 아이들과 무대 가까이 앉은 나는, 부모와 멀어졌다는 불안감에 자꾸 고개를 돌렸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연극에 집중하는데, 나는 멀어진 부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울먹이자, 연극을 망칠까 염려한 엄마가 나를 데려가 품에 안았다. 괜찮다. 울지 마.

다정하진 않지만 충분히 따뜻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가 필요하다. 잔뜩 얼어붙었을 때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 난대 없이 짜증을 내도 멋쩍게 전화할 수 있는 존재. 사실 내가 누구보다 엄마를 필요로 한다는 걸 나보다 더 아는 존재.

 

 언젠가 엄마가 말했다. “나도 내 엄마는 평생 살 줄 알았다.” 의외였다. 그런 말을 하기엔 엄마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진심을 드러내는 필수 조건인 것은 아니다. 엄마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늘 미숙했고, 불현듯 뱉은 그 말이 아마 진심이었을 것이다.


 간혹 나를 지켜보는 날 선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질책과 판단을 담은 시선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나타나 나를 지켜본다. 그 눈이 엄마의 눈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엄마를 바라보기도 했다. 더 날카롭게. 그 눈은 내 것이었다.


 엄마도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엄마’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누군가를.


 깊은 구덩이에 묻혀 있다 불쑥 나를 향하곤 하던 날 선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때로 나를 향하고 때로 엄마를 향했던 모나고 차가운 눈이 드디어, 눈을 감는 것만 같다.


 내일 다시 전화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 순간 내 숨은 차분하고 깊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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