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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Jul 14. 2020

봄에 오면 가장 좋을,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복구작업을 꽃으로 잊는 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 3일을 보냈다. 지진이 난 지 5, 6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도시는 피해복구작업에 열중이다. 시내 도로들도 노면이 울퉁불퉁한 경우가 많고 가는 곳마다 공사차량들이 통제 중이거나 포크레인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짐짓 모르는 척, 관광도시로서의 크라이스트처치를 즐기기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준비해놓고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영국인들이 이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뉴질랜드 안에서 영국을 떠올릴 작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름도 크라이스트처치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길이름, 건물 이름, 가게 이름들도 브리티시, 런던, 글로스터 등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심지어 크라이스트처치 반을 나눠 한쪽은 옥스퍼드 테라스, 한쪽은 캠브릿지 테라스라고 한다.



첫 목적지는 리틀턴이라는 항구 옆 동네였다. 사실 워킹트랙을 걸어 올라가서 뷰를 볼 생각이었는데 차 댈 곳이 애매해 그냥 동네만 둘러보기로. 런던 스트릿을 따라 타운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펍들도 독특한 개성이 있고 카페들도 예뻐서 날씨 좋을 때 테라스에 앉아있는 로컬들을 보며 괜히 미소를 지어 봤다. 요 며칠 크라이스트처치 날씨가 좋아서, 햇빛 좀 쐬려고 공원에 앉아있다가 돌아옴.



첫날 숙소는 페가수스 베이가 바로 옆에 있는 바닷가 근처 캠프그라운드였다. 날씨도 좋고, 물빛도 맑고, 해도 늦게 떨어지니 저녁에 한참 동안 바다를 보기 좋았다.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아직 차가운 물이지만 첨벙첨벙 발을 담그고 노는 사람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들어오면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걸 볼 수 있다. 참 평화로운 여행이다.



하루는 CBD 주변을 좀 돌아보기 위해 나갔다. 정원의 도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보태니컬 가든으로 시작해볼까 하고 공원에 갔는데, 그제야 이 도시를 왜 작은 영국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CBD 안에 있는 해글리 공원을 걷다 보니 런던 하이드파크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다른 도시들에서도 공원에 자주 가는 편이었지만 여기가 제일 영국과 느낌이 비슷했다. 호수 대신 개울도 흐르고.. 근처에서 펀팅+곤돌라+시티 가이드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관광 패키지를 판다고 한다. 어딜 가나 관광 패키지는 큰 관심이 없어서 그냥 돌아다녔는데, 펀팅 배와 신나게 카누 저어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즐거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결제할 뻔.



하루 종일 도심을 걸어 다녔다. 지도를 살펴보니 바둑판처럼 도로 구획이 짜여 있어서 길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사실 구글맵이 있는 한 큰 문제는 없으니까. 아무런 정보 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알고 찾아가는 것보다 좀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다. 여전히 여기저기서 지진 복구공사를 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정원의 도시답게 꽃으로 꾸며진 구획을 보다 보니, 아름다운 꽃들을 보며 그런 아픔을 조금 잊을 수 있으려나? 는 생각을 했다.



마침 내가 도착한 때부터 11월까지 도시 곳곳에서 퍼블릭 아트 전시를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2만 보 이상 걸으니, 돌아다니다가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티투어 트램이 다니는 길을 따라 아트센터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 보니 헤이스팅스 갤러리에서 우연히 봤던 한국인 아티스트 오승열 씨의 설치미술 작품이 또 있었다. 도심 속 작은 캠퍼스인 아트센터는 여전히 곳곳이 공사 중이지만 인포센터, 카페와 젤라또 샵 등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본 대학 건물들과도 상당히 흡사하다.


아름다운 도시. 비록 지척에서는 공사를 하고 있지만.. 저 분홍색 꽃나무는 너무 아름다워서 나중에 마당에 심고 싶을 지경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공원도 우연히 만났다


걷다 보면 우연이 기다린다. 여행책자에서 찾을 수 있는 ‘꼭 가봐야 할 곳’ 리스트에 우연히 도착하는 발걸음. 아직 공사 중인 대성당은 사진은 못 찍었지만, 남대문이 불에 타서 한참 복구공사했던 게 떠올랐다. 목조건물에 치명적인 불과, 석조건물에 치명적인 지진과... 문화유산이 겪는 피해와 복구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젤라또를 먹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리가 아프면 잠시 벤치에 앉아 햇빛을 받고, 또 걸어 다니면서 아이폰 건강 탭에 걸음수를 올려나갔다. 하루에 15,000-20,000 걸음을 기본으로..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지난 글에도 언급했듯 미래의 모습이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면 미래는 쉽게 잊히는 법. 남은 3개월 간 일할 곳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고용주 입장에서 보자면 조금 애매하다. 여름 관광시즌 전에 비자가 만료되어 나가버릴 사람을 뽑을 리가 있나..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아주 깔끔하고 괜찮아 보이는 일식집을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인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였다. 이제껏 알바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프랜차이즈는 오래 일할 사람을 구하는 소규모 개인업장과는 달리 단기여도 괜찮은 경우가 많았다. 지점이 여러 곳 있고 본사가 관리하는 경우에는 채용이나 실제 일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이 확실히 잡혀 있고 그걸 따라주기만 하면 트레이닝이 쉬우니까. 연락해 보니 퀸스타운에 일자리가 있고 단기로 일해도 괜찮다고 하길래 덥석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매니저님과 통화로 면접을 대신했고 트라이얼 없이 바로 트레이닝 해서 일 시작하기로 했다. 그땐 또 미처 알지 못했지.. 단기도 왜 괜찮은지.. 면접은 왜 통화로 하는지.. 트라이얼은 왜 없는지.. 하하..




아무튼, 덕분에 나는 미루고 미루던 타이어를 갈았다. 확실히 이것도 남섬이 비싸다. 지난번 웰링턴에서 타이어 하나에 83불이었는데 여기는 95불이라니..! 네 짝에 휠 얼라인먼트하고 + 와이퍼 갈고 + 앞뒤 라이트 나간 거 갈고.. 지출이 크다. 게다가 요즘 환율이 떨어지면서 유가가 미친 듯이 올라 주유소 갈 때마다 눈물을 머금는데.. 마지막으로 크라이스트처치 한인마트에서 라면을 쓸어 담고 퀸스타운으로 출발했다. 관광도시라 제일 물가가 비싼 곳이라 내려가면 또 덜 벌고 더 쓰는 삶을 살겠지 라고 예상해본다. 그래도 괜찮아! 역시 돈을 쓰고 통장이 텅장이 되어가는 걸 보면 일 할 의지가 생긴다. 



*2018년 블로그 포스팅을 브런치로 옮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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