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빛, 경계 없는 나

저녁 / 1-4

by 지안

카페를 나서자,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공기 속에서도 빛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돌담 너머로 유채꽃 밭이 어렴풋한 노란빛을 품고 있었다.

아직 꽃이 활짝 피진 않았지만,

봉오리마다 노을이 살짝 물들며

조용히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선생님의 말이 여전히 마음 어딘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잘 쓰려던 걸 포기했을 때.”


나는 정말 무언가를 ‘잘’ 하려고만 했던 것 같았다.

좋은 문장, 좋은 이력, 좋은 사람.

좋아 보이는 것들에 맞춰 나를 끼워 넣으려 했던 시간.

그게 노력이라고 믿었고, 때로는 생존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문득,

그 모든 것에서 조금 비껴 나 있는 이 순간이

오히려 ‘살아 있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 길을 달렸다.

거문오름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은 언제나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지지만,

그 짧은 시간만큼은 모든 풍경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페달을 멈추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리고 가만히 섰다.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해가 언덕 너머로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하루라는 책장을 조용히 덮는 것 같았다.


이런 풍경 앞에서는 자꾸 마음이 말 대신 침묵을 고른다.


도시에선 놓치고 살았던 것들이

이곳에선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햇살의 기울기, 풀의 냄새, 내 마음의 움직임.


가끔은 말보다 조용한 장면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지금 이 순간처럼.


어쩌면 나는 그동안,

꿈과 현실 사이 어디쯤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인지 자꾸 비교하고 따지며

스스로를 조급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지금 이 노을처럼,

분명한 경계 없이 조용히 물들어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꼭 그렇게 나눠야 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끝에 닿은 빛이 따뜻했다.

빛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말보다 더 정확하게 위로했다.

꼭 누군가 내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어주는 것 같았다.


누군가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조심스레 건네는 안부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어쩌면 지금까지 잘 버텨준 내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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