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닿는 마음의 속도

오후 / 1-3

by 지안

‘느린책방’

오래된 목재 간판이 달린 카페에 왔다.

사람들은 그곳을 ‘카페 겸 책방’이라고 불렀지만,

나에게는 ‘책방 겸 카페’인 곳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문 위의 작은 풍경이 맑게 울렸고,

그 소리에 맞춰 선생님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왔어?”


그는 은퇴하고 이곳으로 내려왔다는,

50대 초반의 전직 고등학교 문학 교사였다.

그는 불필요한 말은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예상치 못한 순간에

툭 던지는 말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곤 했다.

마치 따뜻한 물을 담은 주전자처럼,

겉은 무심해 보여도 속은 늘 데워져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었다.

그에게 난 자주 찾는 손님이라기보다,

자주 머물러 있는 손님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조천 읍내에서 살짝 벗어난 이곳은 한적했고,

창문 밖으로는 돌담과 유채꽃 밭이 이어져 있었다.

봄기운이 완전히 올라오지 않은 탓에

꽃은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봉오리 하나하나가 제 차례를 기다리는 듯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우엉차? 아니면 커피?”


“커피요. 오늘은 약간 쓴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대답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담긴 뜻을 굳이 묻지 않는 것이,

이곳의 배려 였다.



커피가 내려지는 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노트북을 펼쳤다.

그러나 아무 글도 쓰지 못한 채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몇 줄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멈췄다.

그는 조용히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뭘 쓰려고 하지 말고, 그냥 듣는 것도 괜찮아.”


그 말은 정답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냥,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잠시 머무는 숨 같았다.


“요즘은 그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가만히 듣는 거요.”


내가 말하자, 그가 천천히 웃었다.


“그거면 됐지. 어려운 줄 아는 게, 시작이라는 거니까.”


그는 커피 냄새처럼 따뜻한 말을 남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돌담 위에 앉은 고양이 한 마리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햇살은 그 털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그 안에서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닫고, 작은 종이 노트를 꺼냈다.

펜이 종이를 스칠 때, 이상하게 모든 감각이 또렷해졌다.

한 글자씩 적을 때마다 마음이 조금 더 깊어지는 기분.

생각 없이 타자를 칠 땐 느끼지 못했던 결.

손글씨는 늘, 나를 더 깊어지게 만든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 있다.

그냥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있는 삶.

또는, 그러한 순간이 찾아오는 하루.”


손글씨는 어설펐지만, 이상하게 안정감이 있었다.

글을 쓴다기보다는,

생각과 감정을 한 획씩 눌러가며

마음을 정돈하는 일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천천히 써내려갈수록,

나도 조금씩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느렸다.

책을 읽는 속도가 아니라,

한 사람을 읽는 속도처럼 보였다.


그가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도, 예전엔 나처럼 길을 헤맸을까.’

‘그러다 어느 날, 속도를 내려놓고,

자기만의 리듬을 찾은 걸까.’



카페 안은 조용했다.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

그런 날이 있다.

외부의 소리보다,

스스로의 마음이 더 크게 울리는 날.


나는 고개를 들고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언제 제일 글이 잘 써졌어요?”


그는 페이지를 덮으며 대답했다.


“잘 쓰려던 걸 포기했을 때.”


그 말은 꽤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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