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과 바람 사이에서

낮 / 1-2

by 지안

자전거를 끌고 느릿하게 언덕길을 올랐다.

거문오름을 옆에 끼고도는 이 길은,

몇 번을 가도 늘 낯설다.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바람은 늘 다정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리면,

길바닥에 새겨진 그림자가 자꾸만 달라졌다.

마치 무언가 계속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들을 알아듣지 못한 채,

그냥 그 순간들을 바라보며,

저절로 새어 나오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페달을 밟는 리듬이 조금 무너졌을 무렵,

나는 자전거를 길가에 세우고 천천히 멈춰 섰다.

숨이 찬 것도,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길 어딘가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천의 바람은 그런 나를 탓하지 않았다.

멈춰 있어도 괜찮다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직이 귓가를 스치는 듯 말했다.


제주는 자꾸 나를 멈춰 세웠다.

하지만 그 멈춰 세움은

내가 뒤처졌다는 뜻이 아니었고,

진짜 멈춤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지금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라는 말처럼 들렸다.

길 위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바람이 조용히 붙들어주는 느낌이었다.



길가의 낮은 돌 위에 앉았다.

누군가 일부러 거기에 두었을 것 같은,

작고 단단한 자리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를 섬세히 감싸는 바람을 느꼈다.


잠시 눈을 감자, 풀벌레 소리와

풀잎들이 부딪히며 내는 얌전한 파도 소리,

습기 머금은 풀 향기,

그리고 어딘가에서 흘러온

이끼 냄새까지 겹겹이 겹쳐졌다.


도시에선 감각조차 되지 않던 것들.

이곳에선 너무도 또렷했다.



제주에 온 지 넉 달쯤 되었다.

처음엔 단지 ‘쉼’이 필요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진짜 문제는

‘쉬고 나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의 나는 끊임없이 다음을 생각하며 살았다.

마감일, 면접, 미팅, 경쟁, 남들의 속도..

그 안에서 잠깐이라도 쉬면 뒤처질 것 같았고,

그 감각이 너무 익숙해진 탓에,

멈춰 있는 지금은 종종 불안해졌다.


제주에서의 삶은 확실히 자유롭다.

그런데 그 자유는,

생각보다 더 많은 ‘선택’과 ‘방향’을 나에게 요구한다.


‘나는 계속 꿈을 좇아도 되는 걸까.

아니면, 이제는 조금 현실적인 걸 선택해야 하는 걸까.’


파도가 출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방향을 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자연은 그저 흐르고 있을 뿐인데,

나만 이 흐름 안에서 자꾸 정답을 찾으려 한다.


나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그것이 두렵다기보단,

그걸 모른 채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외롭게 느껴졌다.



‘나, 이대로 괜찮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있었다면 지금쯤

또 하나의 마감이나 취업에 매달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들 그렇게 달리는데,

나 혼자만 이곳에 멈춰 있는 건 아닐까.

이 느슨한 시간에 무언가를 잃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불안 속에서 아주 조용한 평화가 함께 있었다.

불확실하지만, 덜 초조했다.

무언가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쩌면 내가 자유롭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한 번 크게 지나갔다.

내 옆에 쌓여 있던

캐캐묵은 낙엽 몇 장이 툭, 앞으로 굴러갔다.

나는 그 낙엽을 눈으로 따라가다,

어느새 몸을 조금 기울였다.

정해진 길도 없는 풍경 속에서,

작은 것 하나가 먼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닿았다.


‘어쩌면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길 위에 있는 것일지도 몰라.’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나는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이름 없는 풍경 사이를 스치며

다시 조용히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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