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단어가 되지 않은 감정들

아침 / 1-1

by 지안

햇살이 천천히 천장과 벽을 훑으며 방 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귤나무 틈에 자리한 작은 단층집.

봄기운이 막 맺히기 시작한 제주의 어느 3월 초,

나는 아직 이불속에 묻혀 있었다.

겨울 내내 굳어 있던 몸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유독 눈도 잘 내리지 않던 이번 겨울,

서울의 겨울은 참 이상했다.

잿빛 하늘이 하루 종일 내려앉아 있었고,

건조한 입김처럼 금세 사라지는 말들이 무심하게 흘렀다.

사람들은 모두 제 할 일에 바빴지만,

그 분주함 속에서도 어딘가 공허했다.

풍경도, 말도, 마음도 닫힌 채로,

나는 그 무표정한 계절을

마치 투명한 벽 안에서 버티는 것처럼 살아냈다.

숨이 막힌다기보다,

아주 천천히 질식해 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겨울의 끝자락에서야,

나는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겨울 속에서 아주 조용히 녹아내리다가,

견디다 못해 기어코 봄이 좀 더 가까운 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뭔가가 바뀌는 순간처럼.

이곳의 공기는 그런 ‘변화’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이곳엔 아직 벚꽃이 피진 않았지만, 꽃망울은 뚜렷했다.

새벽이면 뿌연 안개가 밭 위를 흐르고,

해가 들기 시작하면 귤나무 그림자가 벽에 드리운다.

그 사이, 내가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몇 초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바람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귤꽃 향이 아주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왜인지 그 향기는 무언가 오래된 기억을 건드리는 듯했다.

작년 이맘때쯤, 회사 면접을 끝내고 나와 걷던 가로수 길..

씁쓸하지만, 서글픈 생각이 스쳤지만,

다시 제주로, 꽃 향기로 돌아왔다.



꽃이 피기도 전, 봉오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연한 향기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쳐버릴 만큼 작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선명히 가슴에 박힌다.


서울에선 그런 냄새조차 없었다.

창문을 열어도 햇빛 대신 먼지가 먼저 들어왔고,

향기보단 엔진 소리가 앞섰다.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좇듯 걸었고,

그 틈에서 나는 항상 어딘가 늦은 느낌이었다.

반면 이곳은, 하루의 시작조차 다른 박자를 갖고 있었다.

제주에 도착한 첫날,

길가에 핀 들풀의 이름을 궁금해하게 된 내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아주 오래 전의 나, 잊고 있던 감각이 천천히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런 향기와도 같은 것을 만날 때마다,

나는 뇌 어딘가에서 작고 투명한 방이 환히 켜지는 걸 느낀다.

그 안으로 뭔지 모를 감정 하나가 천천히 들어온다.

그건 아직 단어도, 문장도 되지 않은 감정.

언어로 붙잡기 전, 삶이 먼저 와닿는 방식.


글은 결국,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언어로 붙잡기 힘든 어떤 감정들이

향기와 같은 매개로 은은히 흘러들어오니까.

글감이 되기 전, 늘 감정이 먼저다.



모카포트가 끓기 시작했다.

커피가 흘러나오는 그 일정한 리듬의 소리는

어느새 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종소리가 되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은 이곳의 아침,

그 안에서 나는 가장 나다운 속도로 깨어나고 있다.


‘오늘은 어떤 문장을 만나게 될까.’


나는 커피를 따르며 생각했다.

글을 쓴다는 건 어쩌면,

이런 하루하루를 섬세하게 포착하는 연습인지도 몰랐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햇살이 컵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오늘도 아주 작지만 분명한 감각 하나를 받아낸 기분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도,

어디에도 완전히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

단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아침.


내가 바라던 자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딱 이 정도. 바람 한 줄기, 커피 향, 스며드는 빛,

그리고 그걸 느낄 수 있는 마음.

그뿐이다.